시집·해설

나를 작가로 이끌어 준 작품 - 이만재

아우를 2009. 4. 22. 11:44

 

                            나를 작가로 이끌어준 작품


                                              자장면, 그리고 「보리피리」……

                                                                                                                                             이  만 재

                                                      

   이 글을 쓰자니 한동안 잊어버린 아픈 기억들, 이미 굳어진 상채기를 다시금 긁어대는 기분이다. 여하간 내게 있어 문학은 일종의 아편이다. 왜냐하면 지겨운 慰安(위안)이기보다 스스로 즐기는 自虐(자학)에 가깝다고나 할까. 때로는 나를 구원해 내는 벗이기도 하지만 종종 가혹한 채찍이기도 하다. 이렇듯이 작가는 모두 독불장군이다. 그렇다. 작가랍시고 저마다 색다른 글 버릇을 갖는다. 자기의 관점을 중요한 요소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가장 자기스러움의 표현이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교를 입학하고서였다. 1960년대 후반은 나라가 퍽 시끄러울 때, 군사정권은 근대화를 통한 자립경제 수립을 명분으로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여 군사독제체제를 구축한 뒤에,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반민족적 반민주적 파쇼정권으로 전화하였다. 이렇게 되자, 억눌려왔던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의식은 급속히 성장하였고, 특히 삼선개헌 반대투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의식과 민족민중운동이 크게 확산되고 있던 때였으니, 그 소용돌이로 사회는 경직된 반면 몹시 혼란스러웠다.  

  

   신촌에 있는 K고교의 1학년1반 반장이었다. 한 학교 울타리 안에는 중학생들, 고등학생들 그리고 주간학생들과 야간학생들, 온통 검정모자에 검정교복이라 마치 까마귀 떼처럼 웅성거리곤 했다. 평소에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깊은 생각 없이 문예반에 들었다. 아마 여기서부터 내 인생에 사달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당시 문예반 담당은 중학교 국어교사이신 元永東(1961년 자유문학 추천) 시인이었다. 문예반은 매주 특활시간에 도서실에 모여 주로 시창작법을 배웠고 토론하기도 했다. (성품이 아주 유하고 인자하시어 못된 학생들이 원 선생님을 ‘멍청이’라는 별호를 붙였다.) 그런 원 선생님은 방과 후 틈만 나면, 나를 도서실로 불러내 윤동주나 이육사의 시에 대하여 깊이 가르쳐 주신 뒤엔, 두툼하게 철끈으로 묶은 중학교 국어시험지 몇 뭉치와 빨간 색연필을 건네주시면서 채점을 하라는 거였다. 매번 시험 때마다 도맡아 동그라미, 빗금을 그어대니 지겨운 일이었지만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이것도 일종의 알바인 셈이다. 시장기를 눈치 챈 원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중국집엘 들리곤 했다. 그때마다 자장면 곱빼기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사주셨다. 꿀맛이었다. 그리고 이따금 슬며시 용돈도 주셨다.        

   그것도 제자의 신념을 굳히려는 일종의 당근이었을까. 약주고 병 주는 걸까. 일주일에 자유시 한 편을 숙제로 내셨다. 어쩌다 미처 준비를 못하면 크게 노하셨고, 좀 마음에 드는 시를 보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어느 날 독서실에서 독대를 하던 원 선생님은 책장에서 한 권의 낡은 시집을 건네주시면서 독후감을 써오라는 거였다. 「보리피리」韓何雲(한하운) 시집……당시 한 시인은 癩病(나병)뿐 아니라 간경화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낮에는 학교, 밤에는 중학생 가정교사로 고학을 하던 내 입장을 생각하신 걸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래서 많이 고독했다. 하고많은 시집 중에 하필, 나병이라는 불치의 병을 겪는 데서 오는 비통과 저주, 울분을 그대로 시화하여 주목받고 있는 한하운 시집인가 싶었다. 지금도 이따금 암송하는 시<보리피리>……보리 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피―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어린 때 그리워/피―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피―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방랑의 幾山河(기산하)/눈물의 언덕을 지나/피―ㄹ 닐니리……同病相憐(동병상련)이었을까. 나의 사춘기에 우수적인 감상에로 깊이 젖어들게 했던, 그러면서 삶의 의욕과 봉사를 일깨워준 작품임은 분명하다. 천애의 나병 환자로, 보리피리를 불면서 걸식과 멸시 속에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며 고독과 향수, 인간적인 괴로움을 달래는 모습이 애처롭다. 시집「보리피리」가 내 가슴에 아직도 각인되어 있다. 그로부터 시작(詩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교 1학년 봄 소풍(1967.6.3)을 간 서오능에서, 참가했던 교내백일장에서 즉흥시<서오능>으로 장원을 했다.


  장안 서녘

  능은 오능


  솔가쟁이 느리어진 잎새

  예대로 묻힌 영원

  무덤인가

  뫼인가


  忠(충)을 사리고

  人心(인심)을 닦다가

  主(주)는 기어이 가고  

  客(객)은 여기 다시 와  

  바람을 잡고 엎디어 있다


  오랜 세월을 지켜 온

  사당은 낡고

  청기와 이끼 낀

  제집 지붕은

  잡초 속에 석양진다

  

  얽힌 말 수다스러운

  歷史(역사) 속에 役事(역사)는 말이 없고

  木心(목심)에 담은

  나무버섯도

  지금은 毒(독)이 없어 더욱 좋다


  薰風(훈풍)이 가신 숲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어라


  李朝(이조) 오백년

  한 줌의 封土(봉토)로 化(화)한

  한숨이 없어서

  차라리 文明(문명)을 등진

  서오능

  솔가쟁이 느리어진 잎새 사이


  서오능은

  장안 서녘

  능은 오능


   그리고 이듬해 2학년 때였다. 계속해 1반의 반장이었다. 원 선생님은 이제부터 남들과 자웅을 겨루어 보란 듯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던 나를 밖으로 방출시키기 시작했다. 시제를 잘 선택하라. 주어진 시간은 1시간이다. 반드시 주최 측에서 배부하는 원고에 곱게 써 바쳐라. 그리고 서두르지 마라라 등등 말씀을 되씹다시피 당부하셨다. 나는 마지못해 나서는 입장이라서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솔직히 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저 원 선생님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사월초파일에 즈음하여 대여섯이 동국대에 들어섰다. 행사장은 소나무 숲이  있고 한쪽에는 테이블과 대형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전국 각 지역에서 몰려든 학생들이라 교복도 달랐고 사투리도 여러 가지였다. 좀 어리둥절했던 나는 선후배들 속에서 참가등록을 하고서 모처럼의 자유로운 시간이다 싶어 마냥 낄낄대며 놀았다. 11시 정각이 되자, 주최 측 도장이 찍힌 원고지가 나누어졌고 옥상에서 시제(詩題))가 적힌 걸개들이 일제히 길게 내려왔다. 지금 떠오르지 않지만 두어 개정도의 시제 중에 일택하는 거였다. 동국대 동대신문사 주최 제6회 전국남녀고교생 문학콩클대회(1968.5.9.)에서 주어진 1시간 내로 즉흥시<강>을 제출하게 되었다. 식권으로 받은 설렁탕을 얻어먹고 소나무 그늘 아래서 중간고사를 대비하여 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오후 1시가 되자, 심사결과가 있고 시상식이 이어졌다. 그리고 뜬금없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너무나 뜻밖이라서 잠시 멍했다. 서정주 시인에게서 얼떨결에 상장과 상품을 받아든 나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히려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때 비로소 원 선생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정된 1시간에 왜 그렇게 길게 써댔는지 모르겠다.


 

  하얗게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일손들

  무엇이 그리워 마침내 우뚝 솟은 산의 땀방울들

  그것은 하늘을 보듬고 자라난 의욕이라고 해도 좋고

  오월의 내 가슴이라 해도 좋다

  내부로는 항시 우렁찬 행렬로 붐비고

  스스로 다스리어 온 감성은

  오직 평화의 새 개척지를 향하여

  발부둥치는 혁명의 너


  때로는

  없는 슬픔

  없는 기쁨

  없는 사랑에도

  엷은 경련의 파문을 일으키며

  파랗게 파랗게 짙어가는 너의 품에

  살며시 구름송이는 잠기어

  하늘색 종이에 흰 물감을 마구 칠한

  그림이 되었어도


  말없이 흐르는 강


  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소매를 걷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손톱이 다 닳아버리도록 땀 흘리어

  일하여 너를 닮고 싶었다

  미치듯 흐느끼는 바람 속에도

  가지련한 매무새로

  강줄기 따라 서서히 걷는 그 마음은

  성자의 계율을 깨우친 너


  강이 열린다


  하얗게 숨 돌리는 아낙들은

  흙손으로 내 볼에 입 맞추며

  출렁이는 이성의 손을 꼬옥 잡으며

  어서, 일어나세요―하며

  다가오는 일손들


  언제쯤부터인가

  내 가슴에 흐르는 강은

  파아란 아주 파아란 꿈이 되어

  아픔을 밤새워 닦아주는―


  강이 흐른다


  강 속에 하늘이 있고

  하늘 속에 산이 있고

  산 속에 내 땀어린 모습이 어린다

  무엇이 그리워 마침내 우뚝 솟은 산의 땀방울들

  하얗게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일손들

    

   다음날 등교를 하자마자 교무실로 들어서니, 원 선생님께선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부둥켜  안고서 펄쩍펄쩍 뛰다시피 좋아하셨다. 내겐 아버지 같았던 이 봉구 교장(감리교 목사) 선생님도 그랬다. 수많은 교사들도 그랬다. 그리고 가을에 총학생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래서 학생회 일로 바쁜 나를 원 선생님은 배려해 주신 탓에 더는 문학콩클대회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그것은 편협된 내 생각일 뿐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3학년(1969,5.23.) 때였다. 나는 3학년 1반, 그리고 여전히 반장이었다. 원 선생님의 지시로 또다시 동국대 동대신문사 주최 제7회 전국남녀고교생 문학콩클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부담감 없이 즉흥시<길>로 써냈으나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연이어 수상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쓴 시라도, 너무나 피상적으로 쓴 것이라 마음에 영 들지 않았던 것이다. 


  추억이 연기처럼 생성하는

  소꿉 노리개가 널린 내 아늑한 꿈길을

  단칸 초가에 달만큼 큰 박이

  걸려 있는

  시골길을, 길을 간다

  나폴레옹의 원정길처럼

  씨이저의 개선길처럼


  나도 그런 길을 걸어간다


  가슴에 단추를 풀고 안경을 닦으며  

  마치 릴레이 선수마냥 달리는 내 마음

  나의 길

 

   이 길엔 이순신 장군이 칼 차고 계시고

  또한 세종대왕이 글 닦고 계시는 길을

  그리스도를 향한 오직 한 길을

  할아버지께서 이백과 두보를 논하시다가 가셨고

  아버지 예수처럼 성스러이 가신 길을

  그 길을 간다


  두툼한 백과사전일랑 x․y를 풀고

  sin, cos를 외우면서

  힘차게 개선가를 부르며

  널따란 길을 향해 달려간다


  어제도 오늘 다시 내일을 맞이하는

  길을, 길을 간다

  내 길이 트인 날

  길은 나요, 나는 길이요

  길을 간다    

 

   학교에서는 깜작 놀라는 거였다. 동대 신문사 주최 제6회와 제7회 전국남녀고교생 문학콩클대회에서 연거푸 수상하였으니, 그러하겠지만 정작 기뻐해야 할 나는 오히려 좀 더 성실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솔직히 말해 그때 건성으로 써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이런 곳에 참가하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무슨 재미를 붙인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원 선생님은 그로부터 불과 20일 만에 있을, 경희대주최 제6회 전국남녀고교생 백일장대회(1969.6.14)에 참가하라는 엄명을 내리시는 거였다. 왠지 싫어졌다. 내심 ‘문학은 여벌로 하여야지, 직업으론 신통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장학생의 신분이라서 단호하게 거부할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럴싸한 핑계거리가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이미 두 번씩이나 수상을 했으나 앞으로 수상을 한다는 보장도 없고 만약 낙방한다면 얼굴을 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원 선생님은 며칠간 나를 설득시키느라 고생하셨다. 자장면 공세는 물론 차비와 점심식대까지 주시면서 나를 달래셨다. 더는 버틸 일이 아니었다. 스승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마지못해 참가를 결심하고 경희대에 들어섰다.

   지난번 동국대에서 봤던 지방학생들이 거의 대다수였다. ‘저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백일장[문학콩클]에만 매달리는 꾼들이구나’ 싶었다. 행사는 동대와 흡사했다. 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학수고대하고 계실 원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나는 일념으로 두어 개 시제 중에 <그늘>을 택했다. 역시 즉흥시였고, 이 작품으로 다시금 수상하게 되었다. 베레모에 빈 담배파이프를 물고 계신 조병화 시인으로부터 상장과 상품을 받았다. 그 무엇보다도 원 선생님께 실망을 드리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햇살이 반짝이며

  고옵다란 빛깔로 수놓은 아침

  이슬에 눈망울을 닦으며

  가만히 숨 쉬는 영혼


  나뭇가지는 물빛을 머금고

  실올 같은 바람은

  음률을 일깨우는 순간

  꿈이 보리이삭처럼 영글어 오며

  가슴을 시원히 적시는 푸른 숨결


    ――그것은 햇무늬다

       무지개 꿈이 한 다발

       땅 위에 지피는 그리움이다


  풀이파리를 윤내는 바람 속에는

  그림자를 닮고픈 마음이 있다


  태곳적 에덴을 그리며

  침묵의 계단을 밟아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거래

 

    ――그것은 부서진 사랑처럼

       햇살에 쬐이어

       까맣게 타버린 아담의 연서다


  끝내 태양과 이웃하지 못한 슬기는

  어둠에 숨어 달력을 헤며

  영겁을 지키는 벙어리


  시원한 그늘은

  결코 뜨거운 가슴을 감추며

  윤낼 줄 모르는 푸른 숨결

    

   전국남녀고교생 문학콩클대회에서 세 번을 수상하자, 교내외에서,「학원」잡지사에서도 취재를 왔고, 인접 학교 남녀학생들에게도 파다하게 그 소문이 이어져 갔다. 그때는 원 선생님을 닮았던 것일까. 멍청이처럼 부끄러워 모자를 푸욱 눌러쓰고 다녔다. 특히 중앙여고 학생들이 극성이었다. 하학 길은 주로 빵집을 피해 가야 할 정도로 피곤했다. 원 선생님에게 순종하였고 다른 교사들에게도 꾸중 듣는 일 없이 오직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그러나 누적된 피로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 모두가 창백한 내 얼굴에 대해 걱정을 했다. 그런 가운데 원 선생님은 공문 하나를 내보이면서, ‘서라벌예대 주최 제5회 전국남녀고교생 문예콩클(1969.10.31)에서 작품을 제출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내심 ‘시로써 그만큼 했으면 됐지, 또 뭘 하라’는 건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서라벌예대에서는 일반대학의 경우와 달랐다. 백일장처럼 모두 가두어 놓고서 즉흥적으로 써내는 것이 아니라, 우편으로 응모된 작품을, 엄격한 심사를 통해 수상자를 결정한다는 거였다. 처음엔 많이 주저했다. 시를 보내 수상한다는 것도 좀 식상할 것 같고 그렇다고 묵살할 수도 없어 머뭇거렸다. 누차 원 선생님께서 마지막이라는 말씀에, 그리고 주제 역시 자유라는 것에 며칠을 궁리 끝에, 장르를 시가 아닌 수필로 돌렸다. 그리고 수필<얼굴>을 제출하게 되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상장과 상품을 받게 되었다. 


  등교시간이다. 21번 버스노선은 항상 많은 얼굴화환을 만든다. 그 중에 내 ‘얼굴’도 한 자리에 선다. 밤송이 같은, 목화송이 같은, 바윗장 같은 인상들을 무의식적인 시각 속에서 발견한다. 숱한 생명이 호흡하는 현실의 대열 속에 나<얼굴>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나의 모든 것이 노출된 ‘얼굴’에는 시시각각으로 기쁨, 성남, 슬픔, 은혜, 사랑, 놀람, 두려움의 적나라한 느낌 그대로가 마치 영화 스크린에 스치는 장면처럼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男(남)’의 접두사를 ‘醜(추)’로 할까,‘美(미)’로 할까 하고 생각하  니 자신의 얼굴이 부끄러워진다.

  인상이라 함은 시선의 凹凸(요철)에서 습득한 느낌이 마음 속 깊숙이 새겨지는 임의의 도장, 의식의 파편이라고 하겠다. 항상 무엇을 암시하려는 얼굴은 누구나 갖고 있고, 늘 무의식 속에 대하여 왔기 때문에 그리 심각한 단어는 아닌 듯하나, 학교 길에 나는 이 장엄한 낱말을 숙고한다.   

  ‘얼굴’.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어여쁘며, 또 얼마나 추한 것이냐! 어질고 의롭고 예의가 잠기고 슬기가 넘치는, 믿음이 흐르는 ‘얼굴’을 내 주위에서 몇이나 얻을 수 있으며, 또 내 것이 다른 이의 값스런 것에 하나로 들까. ‘얼굴’은 머리의 앞부분이다. 나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지닌 뜻을 어떤 학술적이나 논리적으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으나 ‘얼굴’은 분명 하나는 아닌 듯싶다. 어떤 복합적인 의미가 하나로 몽쳐서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얼’자와 ‘굴’자를 나누어 생각해 본다.

  ‘얼’은 곧 정신〓혼〓넋일 것이고, 따라서 판단과 추리를 일정한 견해로 번지고 한 걸음 더 깊게는 생각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의 실마리일 것이다. 또 ‘얼’이 지닌 사상과 감정과 정서는 智(지), 情(정), 意(의)의 근원일 것이며, 이것은 겉에서 일렁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 즉 정신의 세계에서 일렁일 것이다. 물질적 세계를 초월할 실재적인 인간의 財貨(재화)가 곧 ‘얼’이라고 하겠다.

 ‘굴’은 ‘꼴’에서 온 낱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언어학적으로는, 원래 ‘얼꼴’이라고 하는 것이 원칙이나, 모음조화로 ‘꼴’이 ‘꿀’로 변하여, 다시 된소리인 ‘꿀’이 억양상 ‘굴’로 변하지 않았나 본다. 그것은 그렇다고 해도, ‘꼴’이라 함은 사물의 생김새나 됨됨이〓맵시〓모양새를 말할 것이다. 겉으로 나타낸 형상을 뜻하는 것이다.

  나는 일반버스로 통학을 하나 시간이 없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는 좌석버스를 탄다. 5원짜리보다는 20원짜리에 탄 ‘얼굴’에는 화장이나 몸맵시가 분에 넘칠 정도로 매스꺼운 모습을 볼 때가 허다하다. 그것이 남에 대하여 그리 추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감추려는 오만한 인간의 심리가 오히려 불쾌하기만하다. 말하자면 냄새를 풍기는 인간들이다. 속에는 썩어 멍든 것<양심과 체면>이 향료를 통해 악취를 풍겨온다. 어쩌면 자신을 망각한 이들의 반항 같은 애교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또 美(미)의 본질이나 어떤 새로운 발견이나 구김살 없는 美意識(미의식) 활동에서라면 다소 이해하며 공감하고 싶으나 도시 그 표현이 영점인 것 같다. 어떤 ‘얼굴’에서는 풍부한 自然美(자연미)와 人間美(인간미)를 발견할 수도 있고, 또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내 ‘얼굴’ 가만히 의미해 본다. 한국인인 내 ‘얼굴’에서 한국적인 냄새가 나며 고유한 한국의 微笑(미소)가 흐르고 있는가. 자신의 ‘얼’과 ‘꼴’이 잘 융합되어 나의 참스런 ‘얼굴’을 창조하고 있는가 하고 반성하여 본다. 미안하기 그지없으나 지금 나의 ‘얼굴’은 어떤 형으로 모방하여 가고 있으며, 또 어떤 나를 낳기를 원하는가. 또 어떤 새로운 의미의 ‘얼굴’을 키우고 있는지…….

   내 ‘얼굴’이 얼마만한 ‘얼굴값’을 지니고 있으며, 슬픔과 기쁨과, 노여움 속에서 내 ‘얼굴’의 빛은 어떤 색깔을 택할지, 내 ‘얼굴’을 지키고 싶다. 어쩌면 나를 재생하고 있는지 모른다. 무엇에 병들어 가는 ‘얼굴’에 새로운 작업이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얼굴’의 참뜻을 되새겨 본다. 내 ‘얼굴’을 찾아내는 것이 내 공부요, 내 생활이다. 기쁨에 넘치는 ‘얼굴’을 갖고 부족한 상황 속에서 만족을 찾으며 멀어져 가는 현실 속에서 나는 존재의 불을 밝히리라. 죽음에서도 삶을 찾을 수 있는 ‘얼굴’처럼 하학 길에 나는 여러 ‘얼굴’을 구경한다.

                                   


  이렇게 되자, 교내외로 상당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저마다 선발된 문학도들이라서 입상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찮은 일이다. 특히 백일장은 주어진 시제와 시간 속에 완성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문인들 중에 고교시절, 한 두어 정도의 입상도 드물다. 나처럼 네 번씩이나 고교시절, 여러 대학 전국규모 문학콩클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을 지닌, 별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귀신에 흘렸을까. 이것도 성가신 팔자소관이 아닐까 싶다. 이때부터 인생을 스스로 망가뜨렸다고 자탄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괜스레 스승 원영동 시인을 원망하기도 했다. 더러 속도 태워 드렸다. 그도 다 부질없는 것. 시로서 세 번, 수필로 한번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내 인생의 운명과 같은 사달의 전주곡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왠지 가슴 한쪽이 자꾸만 아리다. 예술비평가 보드레르(Ch. Baudelaire)는……‘美는 변하지 않는 요소와 제약된 상대적 요소로 형성된다. 이 요소는 시간의 단편인 모드와 정신적 삶인 열정으로 서술된다. 神(신)의 케�을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흥미롭게 반짝거리는 크림장식들과 같은 이 둘째 요소가 없다면, 첫 번째 요소는 인간의 본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했듯이, 진정한 작품은 철저한 생성의 순간에 비롯된다. 현실성을 있어 자신의 열정을 소모하기에, 藝術作品(예술작품)은 비속한 平凡性(평범성)의 파장을 멈추게 하고, 正常性(정상성)을 타파하며, 영원한 것이 현실적인 것과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美(미)에 대한 不滅(불멸)의 慾望(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말을 되새겨 본다. 그렇다. 평범성과 정상성을 버려야 하는 글쟁이. 나는 결국 문학을 위해 잃은 것이 얻은 것보다 많다. 그러나 身幹(신간)이 편하다. 아무래도 좋다. 나도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으니……이제는 병마와 방황 속에 있던 한하운 시인도 그리고 원영동 스승도 이승에 안 계신다. 하지만  나의 문학의 거름이 된 자장면의 그 맛과 시집「보리피리」의 서러운 이미지만 아직도 내 가슴을 적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