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법인한국생명의전화수필집

다시 찾은 나의 길

아우를 2009. 3. 16. 20:19

     다시 찾은 나의 길

 

 깔깔거리는 애기들의 웃음소리가 정겹다 지원이 음성처럼 들렸다.  아주 오랜 동안을 여자아이의 울음소리만 들려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나는 쪽으로 쫓아 나가곤 하였다. 친정집에 맡겨졌던 어린 딸의 음성이 기억속에 각인되어 착각을 일으키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헤프닝이 수없이 벌어 졌었다. 성장하여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거기있던 4살의 딸을 찾고 있는 모습에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다 손주 지원이가 태어나고 부터 그 병이 점차 사그러졌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도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기록 하나 하나를 들쳐 보면서 군데 군데 흘렸던 눈물 자욱이 남아 있어서 그날의 아팠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 났다. 지금은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려 일상적인 삶을 입력시키고 있으니 흐르는 눈물을 받아 흔적이 되어 줄 노트가 없어 졌다. 생각하니 이기문명은 감정도 매마르게 하는 듯 하여진다. 그렇다고 인간의 정이 매마르기야 할까마는 세상은 많이도 변하였다.  그때 남편의 주검으로 우리 가정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사방이 온통 절망과 슬픔뿐.  삶의 의욕은 어느 한 구석도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필설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남편 잃어 버린 슬픔으로 하느님에 대한 원망은 하늘을 찌를 듯 끝도 없이 이어 졌었다.

 

 "남편 앗아 가지 않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귀가 막혀 있어서 살려 달라는 구원의 기도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돌적인 울부짖음이었고 항변이었다.  지금도 세상 떠난 남편을 생각하면 설음이 복바쳐 오고 가슴이 절이고 눈물이 쏟아진다.  큰 아들의 결혼식날 엔 흐르는 눈물에 참으로 민망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루도 편한 날 없이 법률 서적과 씨름 끝에 받은 공직생활, 당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거쳐서 국무총리실에서 요직을 맡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디 젊은 남편이었다. 거기에 철모르는 어린 삼남매까지 있었으니 두고 갈 수 밖에 없는 남편의 비애, 지금도 그 심중을 생각하면 이제껏 내가 살아온 아픔의 세월보다 그가 지고 간 주검의 고통이 나를 더 슬프고 가슴을 절이게 한다.  내가 어렵고 힘들적마다 남편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살아 있는 내가 낫지"  스스로 위로한다.  장작처럼 굳어 버린 몸뚱이에 베옷 한 벌 입고 가길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둘러 갔는지, 책에 매달려 살아 온 수고의 세월이 억울하지도 않았는지.

 

 그러한데도 두고 가는 처자식 걱정 뿐 남편은 자신의 고통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간까지도 가슴에 담아두고 말하지 못한 그의 아픔을 나는 알기 때문에 더 애달프고 슬퍼 한다. 바보같은 사람!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대신하여 키워준 형님의 모습을 보고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종의 순간에 흘린 두줄기 눈물의 의미를 나는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심중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찣기운다.  이해한다는 것을 사랑으로 고쳐 쓰고 싶다.  이해하는 것,  함께하는 것, 공감하는 것.   

 생명의 전화에서 하는 상담봉사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진다.  나는 내가 가장 외롭고 슬프다고 생각될 때 나와 같은 처지나 고통이 있는 이웃에게 더한 관심을 갖게되고 이해를 하여 주고 도와 주려고 노력을 한다. 그래서 작은 도움으로 걱정근심이 사라져서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고 세상이 밝아 질 수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눈물젖은 빵을 먹어 보았기에 마음을 함께 나누고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더욱 솟아 나는가 보다.  

 

자신을 위해 기도 해 주면서 임종을 지켜 달라던 젬마 때도 그랬고,  동생의 주검이 준 상처로 눈이 짓물렀던 율리아나 그의 언니에게도, 남편잃은 60대 주부가 살고 싶지 않다고 몸부림 칠 때도 함께 해 주었다.  때리는 남편을 피해 찾아 온 그녀와도 몇일 밤을 함께 하면서 분노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어 주기도 하였다.

 

  어느날 이른 아침에 걸려온 생명의전화에서의 상담은 2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 된 적도 있었다.  간암 환자의 절망과 고통의 눈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음성은 슬픔과 비애, 고독과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그에게는 세상적인 어떤 언어로도 위로나 힘이 될 수 없었다. 너무 늦어 버린 그의 삶이 안타까웠다. 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말을 들어 주고 그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긍정적으로, 젖은 눈물을 잠시 멈출 수 있도록 해주고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신에게 의지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 할 수만 있으시다면 주님 그에게 평와의 안식을 얻도록 하소서."  주님께 간원의 기도도 드렸다.  그러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만이 그의 생의 비애와 절망과 고통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임을.  그분의 은총만이, 사랑만이, 잊혀지지 않는 상담이었다.  

 절망과 고통이 있을 때 함께 해 줌으로써 희망과 생명에로의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또한 내 의지에 의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절망의 기로에서 탄식하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었던 생명의전화 봉사자, 그로부터 받은 위로의 몇마디는 내게 정신적인 평정과 삶의 가치와 생의 용기를 갖도록 하였다. 물론 몇 마디라고 쉽게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따스한 한 마디의 위로와 이해하면서 함께 하여 준 말이 절망의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23년째 나도 상담봉사를 하여 오고 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봉사를 하였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삶의 가치와 생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주어진 삶이 힘들었지만 모름지기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방법이되시고, 길이되시고, 의지가 되어 주신 주님을 의식하며 살도록 하였다. 그래서 봉사를 하였다는 말은 왠지 주눅들고 나를 부끄럽게하여 숨어 버리고 싶어지게 한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의 오묘하신 진리와 사랑도 조금씩 터득도 하게 되었다.

 

 가슴졸이며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근 사반세기를 생명의전화 공동체와 함께 하는 동안에 어렸던 삼남매 또한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한의원을 차린 큰 아들과 사업의 기초를 다지고 있는 둘째 아들, 토끼같은 막네 딸도 변리사 이차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다.  고맙다.  19개월 된 손주 지원이가 서툴고 어눌한 말로 "엄하니" 라고 불러주기도 한다.  예쁜짓으로 재롱떠는 귀여운 모습도 보게 되었다. 오랫만에 만났는데도 손을 잡아주면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잡혀주는 손주가 사랑스럽다. 가슴 짜릿한 사랑을 느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어휘는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없던 용기도 힘도 솟는다. 힘들었던 기억도 지쳤던 추억도 "엄하니"라고 부르는 손주를 통하여 환희도 느끼고 천사의 모습도 그려 본다.  혼자 누리는 행복으로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하지만 먼저간 남편도 우리 가족과 내 모습을 보면서 마음 흐뭇해 하리라는 느낌을 갖고 산다.   밖에서 재잘대고 떠드는 이웃집 애기들도 사랑스럽고 천사처럼 아름답다. 가서 한 번 꼭 안아 주고 싶다.  "엄하니" 라고 부르는 지원이 음성이 또 듣고 싶다.  할머니라고 고쳐 불러 줄 날이 곧 오겠지.

 

 참으로 많은 추억과 애환이 서려있고 깊은 인연이 되어 있는 생명의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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