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음성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만들었다고 자랑을 한다.
그때 딸아이가 먹었던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기억조차 희미한 모습의 영정 앞에 달아 놓은 카네이션,
그 카네이션에 담겨진 먼 추억의 아빠의 모습, 가끔 꿈에서 만났다는 형체잃은 아빠의 형상,
그나마 그 아이에게 위안이 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련만 더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잘 타일러 달라던 숨가쁜 남편의 음성 속에서 영혼이 찢기우는 아픔의 소리를 들었었다.
그 음성은 가슴 깊숙이 소용돌이 치는 격한 파문을 던져 주고 지나가곤 한다.
좌절당한 삶을 내 놓을 수밖에 없었던 남편에게서 인간 의지의 한계를 실감케 되었던 그때,
죽음이 준 허무로부터 난 영원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건 그토록 뼈아픈 시련 속에서도 방황하는 한 영혼을 정착시켜 줄 수 있었던
사랑의 여백이 있었음이다.
고마운 일이다.
깊은 병세에 육신은 녹아들고 육신이 녹아드는 것보다 더 강한 삶의 욕구,
그리고 그로부터의 좌절,
현세에서 지은 잘못을 깨닫게 되어 신앙에 귀의 하고자 한다는
한 여인의 안타까운 음성은 온 마음을 뒤흔들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랑하지도, 할 수도 없는 친구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불륜의 관계로 이혼 당한 친구를 구제해 주려다 또 다른 불륜의 관계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떳떳치 못한 생활은 나 자신마져 속인 것이었으며
이제까지 남편을 보복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아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무슨 조화인지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이 내린 겁니다.
폐암이에요, 폐암."
흑흑 느껴 울며 울부짓는 슬픈 탄식과 피를 토할 듯한 음성,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내쉰 긴 한숨,
무거운 침묵만이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줄 수있는 도움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소생할 가망 없는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은 내게 마음속 깊숙이 묻혔던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임종이 오기 전 잦아 들어가는 음성으로
"당신에게 너무 무거운 짐 다 지우고 가는구료. 미안하오. 나는 몌수님이 하느님 아들임을 확실히 믿고 먼저 가오."
하며 오른손을 들어 주던 남편의 모습과 청각 깊숙이 무의식 속에 잠겨졌던 음성을
다시 듣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였다.
오랜 세월 가슴에 묻혔던 못다한 정이 담긴 삶의 음성을 그녀에게 들려 주고 싶은 충동은
어떤 연유의 소치였는지............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음을 스스로 어찌할 수 있는 삶도 아니거늘 유한의 세계에 사는 존재임을 잠시 망각하여
오늘을 살기에 급급한 인간들,
무너지는 한 육신의 삶이 구제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
잘못 산 삶으로부터 오는 죄의식,
무너지는 영원성, 그로부터 영혼이 구제되고 싶어짐이 어디 그녀만의 바람이겠는가?
흙으로 빚어진 육신이므로 흙으로 돌아가야 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이는 신의 섭리이거늘,
떨쳐 버려지지 않는 죽음의 공포와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지 않을까?
세상의 육신이 대지를 지붕삼아 편히 누울 때
우리 영원한 그곳에 무얼 가져갈 것인지,
벌거숭이되어 사실 그대로를 내 놓을 때 그리스도를 통한 깨긋한 영혼 말고 드릴 것 없는 우리가 아닐는지.
"죽음이 두렵지요? 폐암이라면 너무 큰 충격이군요. 인간의 의지론 견디기 힘들죠,"
"네, 그래요. 육신이 부서져 혼백이 다 날아가 없어지는 순간까지라도
더 살아 회개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세월을 묶어 놓고 인생을 다시 바꾸어 보고 싶은 그녀일테지만 현실의 삶은 급속도로 단축되어 가고 있을 것이니
그녀의 초조한 음성이 안스러울 뿐이다.
"네, 왜 안 그러시겠습니까? 지금, 지난 잘못을 통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어떤 처지에 있든 잘못을 뉘우치는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삶이 있는 우리 모두가 가야 하는 길이며 누구나 당할 세상의 고통이 아닐는지요?
단지 조금 먼저 가고 나중가는 차이는 있겠지요.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대단한 건 아니지요.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거슬러 올라가 태초까지 다달아 보면
누군가 인간을 만든 분이 있다고 믿으실 수 있는지요.
그분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존엄한 것이고,
존엄하기 때문에 그분이 영원한 생명 그곳으로 거둬 들여 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적으로는 현세의 죽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삶이 옮겨가는 것이라고 하죠.
곧 생활의 연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살아온 생 전부가 모순투성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참으로 뉘우치고 잘못을 깊이 반성한다면,
우리의 피난처가 된다는 그분께 나를 의탁한 신앙은 구원될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믿으십니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우리 중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각기 다른 죄인으로 있을 뿐이지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허물을 씻고 영원한 곳 천상 예루살램을 가는 거지요.
지금도 가고 있으면서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하느님은 벌 주시는 분이 아니시거든요.
어떤 방법으로든 사랑을 주고 계시지만 우리가 의식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다 보니 잘 잘못도 분간 못했던 건 사실이죠.
그분 안에서의 삶이었다면 이런 생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생의 종말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산 삶이었지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또한 까맣게 잊고 살았지요.
생각해 보면 죽음만을 두려워했지 그보다 더한 구원은 미처 깨닫기 못했었죠.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죽음을 생활의 연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믿음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의 고통에 나의 고통을 보속으로 바쳐 사망으로부터 온 영광된 부활을
그분과 누릴 계기로 일치시키신다면, 우리 소망인 영원한 삶을 신으로부터 약속받게 되는 은총을 누리실 겁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녀가 삶의 좌절에서 신에 의해 구원된다고 믿을 수 있다면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누릴 것이다.
자신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알고 기다리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또 있을까마는
그러나 신앙은 능히 마음의 평화를 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미련이야 어디 그리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생을 위한 삶만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삭막한 생활만이 존재할 것 같군요.
죽음이라는 사실이 내게 반성할 기회를 주었군요.
지금 당하는 고통을 보속의 재물로 그분께 드리며 통회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친구에게 전화하여 용서도 빌어 보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응어리진 가슴이 풀어졌으면 합니다.
내가 지닌 남편에 대한 모든 불신과 미움도 없에겠습니다.
그리고 임종이 오기 전 늙으신 어머니의 두 손을 포근히 감싸 드리며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신앙 안에서의 용서와 고통을,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랑을 드러내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을 그녀,
그리스도와 일치 시키려는 생의 고뇌를 그녀에게서 보며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이의 동반자는
결국 하느님이신 것을 다시 깨닫는다.
"저 같은 삶 누구도 갖지 말아야겠지요. 고맙습니다. 영원한 나라의 빛이 당신께도 비춰지길 빕니다."
가쁜 숨으로 답답해 하면서 마지막 남긴 그녀의 음성이다.
남편의 마지막 음성을 떠나 보낸 마음 같았다.
흐려진 두 눈이 주시한 허공이 불투명하게 흔들려 보인다.
인성을 취하사, 육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 가 본다/
시궁창에서 허우적대는 육신/
삶을 포기한 인간을/
인간의 가슴을 저주하는 영혼들을 찾아가신다.
얼룩진 영혼을 쓸어 주시고 상처난 마음을 동여 매 주시며/
병든 영혼 구원코자/
죽음도 사양치 않고 우릴 찾아 오신 주님/
사망으로부터 온 부활은/
우리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가슴도 사랑을 실천하신/
당신을 닮도록 도와 주소서 /
주여! 그녀에게 평화의 안식을 주소서.
198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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