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들녘

어머님께서 되 오심은

아우를 2009. 1. 26. 11:46

       

                                  어미님께서 되 오심은

 

   길가던 노인이 거할 곳 없어 도와 달라고 한들 신앙인이라면 "예"라고 해야 됨을 하물며 어머님의 청인 것을 나는 기꺼이 "네, 오세요. 어머님" 하였다.

  두 분의 아주버님이 계시지만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셔서 모시고 산 어머님이다. 그러나 어머님은 믿었던 아들의 참척을 당하고 뼈를 깎는 아픔속에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린 손주들이 제 밥 챙겨 먹을 때까지라도 함께 살며 도와 주십사고 눈물로  간청하였으나 냉혹하게 뿌리치고 가셨던 어머님, 그날의 어머님 모습은 오래도록 용납되지 않고 상처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십년 세월이 지난 이제, 날 필요로 하는 어머님이 우리 집에 다시 오시었다. 내 손을 잡으며 자식들과 너 살기도 바쁜데 하시던 8순 노모의 눈에는 고뇌와 회한이 서려 있었다.

  지난날의 수고와 보람은 추억이 되고, 고독과 외로움찬 어머님의 모습은 고통이 되어 먼 훗날의 나를 생각케 했다.

 

 

  '77년 2월 22일 남편이 타계하고 열두번째 온 생일(`88.9.23) 연 미사였다.

  다른 때와 다르게 어머님께서는 평생 가슴에 묻어 두었던 생의 슬픈 심정들을 처음으로 털어 놓으며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출근하는 나를 먼길까지 따라 나오며 잘 다녀 오라고 하시며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멈춰 서 계시었다.

 

 

  오늘 따라 가슴에 묻힌 아들에 대한 아픔을 삭히느라 그러시는가, 나도 눈물을 닦으며 뒤돌아 보지 않고 태연한척 걸어 나왔다.

 남편 떠난 슬픔에 휩싸여 참척당한 고통을 가슴에 묻고 사신 어머님의 골깊은 상처엔 위로 한 번 드리지 못한 세월이었다. 표현없이 사신 어머님께서는 오죽하셨으랴.

 

 

  나는 매일 오후 1시경이면 점심을 드셨는지 여쭙는 전화를 어머님께 했다. 그날도 의례적으로 전화를 하였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3일 후 9월 26일('88년)은 추석 명절이라 운영하는 상가는 드나드는 고객으로 몹시 바빴다. 그러나 계속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둘째 아들이 집에 들어 감으로 화장실에 쓸어져 계신 어머님을 발견하였다. 황급히 병원으로 모셨으나 뇌출혈로 소생이 어렵다고 하였다. 최선을 다 하였으나 어머님께서 소생을 못하시고 끝내 돌아가셨다. 경황 중이었지만, 평소에 원하신 바를 임종에 이르러서야 '안나'의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머님께서 되 오심은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함이었는가, 맺힌 가슴의 상처를 풀어 주기 위함이었는가.

 

  어머님, 세상의 온갖 잡다한 근심 걱정 모두 잊으시고 천상에서 편히 쉬시옵소서.

  주님, 당신께 맡겨진 영혼이옵니다. 세상에서의 온갖 수고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우리네 인생이 고통이더라도 사랑의 여백을 보여 줄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짐을.

 

                                         1988년 9월  씀

                                           1990년 미루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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