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1년 여성중앙 11월호(원고청탁재정리)
더없이 사랑했던 남편
"엄마! 엄만 왜 아빠 무덤에 꽃을 준비안해?" 하며 뒤처져 따라오던 막내 딸의 손에 코스모스가 한 아름 들려 있다.
가슴이 뭉클 하다.
그인, 큰아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이 세상을 떠났다.
임파선 암이라는 확진이 떨어졌던 지난 '76년 10월,
나는 앗찔하여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쓸어 지려는 순간에
"정신차리세요. 보호자가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환자 생각을 하셔야지요"
부축여 주는
주치의의 고성에 휘청이는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살려야 한다는 일념 뿐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먼저 의사들이 말하던 사망률에 관한 통계를 상기했다.
잘하면(?) 그러나 잘못하면 .........
결혼 10년 째로 아내로도 엄마로도 행복은 이런것이구나를 느끼면서 살고 있던 우리에게 이 왠 청천벽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 쳐 왔는가.
연애하던 시절엔 그이와의 나이차이로 결혼에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웃는 얼굴이 소년처럼 깨끗하고, 박학다식하며 자상한 그와 우린 `68년 3월 19일 결혼식을 올렸다.
쪼들리는 생활이었지만 우리는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낚시를 좋아하는 그이와 함께 팔당, 예당. 안성, 파로호 등으로 고기를 낚으러 다녔다. 작은 물고기는 놔주고, 때로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수면을 바라보면서 세월을 낚는 기다림의 인내를 배우기도 하였다.
남편의 자상함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정부의 기업통제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던 남편은 어려운 가운데도 행정고시에 합격을 했다.
공무원으로서 긍지를 가졌던 남편은 인간들의 공동 사회생활에 필요부가결한 요소로서의 상식을 넘어 성실하고 도덕적이며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맑은 남편이었다.
기업은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켜야 하며 빈부의 균등을 열변하던 그이는 경제, 종교, 문학까지도 섭렵하는 등 그이의 관심은 다양한 분야에서도 전문가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그는 가끔 소화가 안된다고 했다.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종합진찰을 권했으나, 당시는 그이가 맡은 서정쇄신 업무와 법개정 등의 바쁜 업무로 병원에 입원하여 종합진찰을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 불가능으로 결국은 남편의 건강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위속에 있는 임파관에는 종양이 자라 편도선까지 2차 전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감기가 잘 낫지 않는 것은 힘든 일과로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76년 3월에 발병한 감기증상으로 10월에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임파선종의 진전으로 그 경과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있어 소생의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이를 살려야 한다, 살려야 해. 살려야 하고말고' 나는 신에게 매달려 기적이 일어나도록 도와달라고 믿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이 에게는 임파선염이라고 병명을 말해주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밝에 웃어주었다. 병명을 그이가 안다면 치료를 당장 포기할 것이기 때문에 주치의사도 간호원도 그렇게 알고 치료를 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였는데도 그이는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병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못 고칠 병이라면 차라리 포기하자고 하였다. 돈 잃고 사람까지 잃으면 어떻게 하느냐 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잃는다해도 남편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76년도 당시에도 암 치료약이 수입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나는 동분서주하며 치료비를 구하여 1%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내가 믿는 신에게의 기도로 남편의 병이 완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회복이 어렵다고 퇴원을 권유하던 주치의사에게 1%의 가능성이 있다하드라도 최선을 다 하고 싶습니다. 왜 박사님은 간접적인 살인행위를 하실려고 하느냐면서 강한 어조로 항의를 하며, 방사선 치료도 받게 해 달라고 하여 치료를 받으러 조선일보사 근처에 있던 원자력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기도 하였다.
여윌대로 여윈 남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터질 듯 통곡하고 싶었지만, 그이에게 나의 약한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이가 살 수 있다면 내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그이는 피하기 어려운 죽음이라는 것을 예감하는 것 같았다.
"내가 ..... 당신한테 정말 못할 짓을 한것 같아. 내가 죽으면 뭘 먹고 살지?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죽긴요. 왜 그렇게 자신없는 말을 해요. 살 수 있어요"
가슴이 뻐개지는 아픔이 나를 휘몰았다. 그러나 그 아픔이 괴로움이, 그에 비할 수 있을까?
나는 울음을 감당할 수 없어 병실을 나왔다. 통곡을 하였다. 사랑하는 남편,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마음과 몸이 우린 하나였는데, 그 하나가 둘로 나뉘어진 다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린 나는 가슴이 꽉 막혀왔다. 그이가 정말 내 곁을 떠난단 말인가? 나는 그를 더 그리고 많이 지켜보고 싶었다.
병실을 들어서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 갔다 왔어? 형님이 보고 싶은 데. 아마 형님도 몹시 슬퍼할 거야. 내가 죽으면...."
" 왜 그런 약한 말씀을 하세요."
일찍 아버지를 여윈 그이는 형님이 가난한 생활에서도 동생을 위한 너무도 철저한 자기 희생으로 서울대학을. 그리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까지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아무 일에나 몸을 던졌다고 늘 말해왔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런 일로도 형님의 희생과 견줄 만한 일을 못했음을 그는 아쉬워했다.
그는 고통이 있을 적 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고통을 견디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가쁜 숨을 몰아 쉬었고 오른쪽 옆구리의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그는 피주사 2병, 링거 2병, 아미노푸신 1병 그 스케줄대로 매일 매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래가 자꾸 끓고 기침을 심하게 하는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나누어 아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던 어느날, 죽음을 5일 앞둔 날이었다. 그날은 구정이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그날 아무래도 모든 사실을 말하고 임종의 준비를 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가슴에 맺힌 서러움을 그이와 나누며 실컷 울어보고 싶기도 하였다.
소생할 가망이 없음과 이제까지 속였던 병명을 말해 주었다. 그인 담담하게 태연스럽게 모든 걸 받아 들이는 것 같았다.
"이미 각오한 일인데 뭘. 그런데 당신 어떻게 살지? 너무 힘들게 살지 말어. 등을 떠밀다시피하며 결혼을 했는데 청상과부를 만드는 구나. 아이들 명랑하게 키워. 그리고 당신 행복하게 해 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재혼해. 여보! 사람이 한 번 왔다 가는것은 하느님의 섭리인걸 어쩔 수 없지않아? 이렇게 노력해도 안되는 걸. 난 말야 행복해. 당신 앞에서 죽고 있잖아. 목욕을 언제쯤 할까? 장래준비도 서서히 해. 천주교 묘지로 가고 싶어."
그는 단숨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동안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려 놓고 말았다.
많은 친구분들이 다녀갔다. 침착하고 태연한 그이의 행동은 인간을 초월한 그런 행동 같았다. 그는 친구인 김선생에게 나의 아내가 원한다면 아모레화장품코너를 내어줄 수 있느냐고 부탁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온 전신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장례문제와 안방이 좁으니 책장과 전축을 옮겨 놓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 끝에 나는 그가 운명하는가 싶어 마음을 조였다. 오후가 되자 그이는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주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다며 땀을 죽 흘리며 쓰러졌다. 손톱이 시퍼렇게 되었다. 난 허겁지검 의사선생님을 모셔왔다. 산소호흡을 시키고 한참동안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이에게 링거를 놔주기 위해 혈관절단을 하여 겨우 주사를 놓았다.
그이는 중환자실로 옮겨갔다. 나는 그이를 퇴원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1977년 2월 22일 맑음
아침부터 퇴원을 서둘렀다.
산소호흡기를 떼는 불안은 있었지만 임종을 병실에서 맞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하룻밤이라도 함께 지내고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우린 많은 시간을 대화 했다.
그이는 아이들의 교육방침 유언.
첫째는 그룹활동을 해준다.
둘째는 체육관 같은 곳에서 몸단련을 시킨다.(당수, 태권도 등등)
셋째는 명랑하게 크도록 해준다. (생활분위기)
넷째는 좀 크면 보이스카웃에 들도록.
다섯째는 될수록 발표력을 길러줘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여섯째는 대학은 무리하게 보내지 마라.
위의 사항은 진호, 일호, 정일에게도 동일하며, 일호에게 관심있게 해 줘라. 네게도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 일호 키우기가 힘들 것이다. 진호, 일호, 정일이. 이 애들이 열살이 넘으면 자기 아빠(이 대목을 말할 때 목이 메어 몇번을 울먹였다)가 이세상에 없다는 것을 고민하고 그럴 때 잘 타일러라. 당신은 모른다. 아빠 없는 아픔을 모른다. 정일이는 잘 키울 수 있을 거다.
책은 연애소설 그런것 보다 세계 위인전 같은 걸 보도록......
그리고 그는 내게 행복했냐고 물었다. 자긴 행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꾸 미안하다는 말뿐 할 말이 달리 없다고 했다.
간호원이 들어와 박선생님 어떻게 해요, 하니까 그는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며 악수를 청했다. 오전 11시경 한박사의 배려로 앰브런스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그이는 성당에 전화하기를 원했고 임종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찾아온 문병객들에게 그는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그인 십자가 를 보이면서 "나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임을 확실히 믿고 갑니다. 잘들 계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 숨이차서 말을 않할 거.." 라며 그이는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혜화동 홍신부님이 기도해주시는 가운데 봉성체까지 받들고 그인 희미해진 정신을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진영 시아주버님은 그이를 붙들고 "지금 죽으먼 안된다. 큰 형님이 지금 서울에 도착하셨다. 형님보고 가거레이" 하며 몸부리을 쳤다.
곧 큰 시아주버님이 도착하였고 그인 죽은 줄 알았건만 하얀 눈을 뜨고 큰 형님을 바라보며 그때 처음으로 눈물을 죽 흘렸다. 뭔지 자꾸 말을 할 듯 입을 움직였지만 끝내 말은 통할 수가 없었다. 죽음직전까지도 청각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인 발을 조금 들었다 놓더니 조금 후 종용히,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후 5시경. 우린 모두 그이가 좋아하던 성가를 불러주었다. 내가 죽더라도 절대 슬퍼하지 말라며 오른 손을 들어주던 그는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나는 그로부터 삶의 욕구가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아이들의 문제, 살고 싶은 욕구가 없어도 내 마음대로 목숨을 버리는 일도 무척 힘들었다. 요령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생명의전화에 내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참고 견디었던 온갖 삶의 비애를 낯선 목소리에 봇물처럼 쏟아 놓고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따뜻하고 친절한 말속엔 삶은 죽음조다도 영광된 것이며 나를 필요로 하는 소중한 것들의 가치에 생각을 맞춰주고 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늘 마음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또 한 번 귀 밑으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다.
그인 아직 사랑의 종말을 고하지 않았으며 영적으로 나와 교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살아야 한다. 이 지상의 아름다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삶에서의 탈락이며 패배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혼자만의 몸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9살, 5살, 3살로 어린 탓도 있지만 심한 타격을 받지 않도록 마음을 쓴 탓인지 둘째인 일호는 그이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자기 아빠 이름을 부르며 바꿔달라고 떼를 쓰는게 아닌가.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아빠의 죽음을 알리기가 가슴이 아파 "아빤 하늘나라에 하느님을 만나려고 갔단다" 했더니, 아빠는 신나겠다고 하면서 구름타고 쏴~내려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어린 아들 일호의 말이다.
나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이가 떠난 빈자리엔 숨막히는 현실뿐 회피할 길은 없었다. 그때는 월급봉투를 넌즈시 쥐여 주던 남편의 밑천이 있었으니 생활의 위협같은 건 없었건만,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기본적인 쌀값과 연탄 등등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야 했다.
봉재를 하면 살아갈 수 있다는 어느 지인의 말을 듣고 낯설은 일에 손을 대 보았다. 그러나 그것마져 재료비, 최소한의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고, 그 당시 돈으로 2백만원을 고스란히 날리고야 말았다.
투자한 금액을 모두 날렸던 나는 다소 세상인심을, 또한 실패한 원인을 분석할 수가 있었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내가 관심이 있는 직종을 택해야 했고 영속성이 있어야 했다. 적어도 내겐 부업이 아닌 주업이었으니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임종시 그이가 부탁하였던 태평양화학의 김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빈 털털이인 나는 고마운 분들의 배려로 은행융자를 얻었고, 작은 점포에 화장품을 진열했다. 권리금이 큰 점포를 빌리는 것도 위험하고, 판매 루트도 고려해야 했으므로 처음엔 소규모로 조금씩 이익을 높여 그 이익으로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아이들은 엄마인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열심히 공부를 하여 주었다.
헌데, 큰 아이인 진호의 담임선생이 부르는 게 아닌가. 가슴이 쿵 내려 앉는 불안을 안고 학교를 찾았을 때 선생님이 내민 일기장엔 진호의 피맺힌 사연들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그 글을 읽고는 선생님도 나도 그만 울었다.
1980년 5월 2일 (큰 아들 진호의 일기)
'저 높은 곳에 보이는 구름에 아빠가 계실까? 나의 마음을 읽고 계시겠지. 어쩌면 나의 마음에도 아빠가 계실거야. 집안에도 교실에도 언제 어디서나 만나뵐 수 있겠지?
오후 4시 태양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큰 구름이 있다. 거기에 아빠가 계실까?
여기서 보이는 모든 아저씨들이 아빠같이 보인다. 하늘을 나는 새도, 노래하는 새도, 멀리 휘날리는 태극기도, 앞에 있는 나무도 오늘은 어쩐지 아빠같이 보인다.
불어오는 바람도 아빠 목소리처럼 들린다. 진호야 !진호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내 옆에서 노래하는 참새도 아빠가 보내셨을 거야. 나의 생활을 보라고. 아빠 보고 싶어요.'
나는 진호의 일기에 대해 무어라 말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들이 일기에서 열거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실상는 생활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엄마의 무관심(?)에서 온 것이다. "어머니, 우리 아빠를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멀리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고 생각하고 지내면 훨씬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아요" 하며 위로하던 그 아들이 아빠의 그리움으로 아빠와 모습이 비슷한 선생님께 아빠라고 꼭 한 번 불러 보겠다고 간청을 했다니... 나는 눈시울이 자꾸 뜨거워졌다. 그리고 학교로 편지를 썼다.
-소중한 내 아들아!-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셨단다. 그렇다면 인간 모두에게 하느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인간속에 하느님을 찾듯 아빠의 모습 또한 모든 사람 속에서 찾을 수 있단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나, 그리고 일호, 정일이도 어느 특정한 사람을 좋아하기 보다 우리 가슴속에 남기고 간 아빠의 영원을 사랑함이 어떨까? 하느님이 늘 네 곁에 계시듯 아빠도 네 맘속에 머물고 있음을 엄만 믿고 싶단다. 내 사랑하는 아들 진호야! 슬픔이란, 네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좌우 될 수 있단다. 아빠가 가고 빈 자리만 있는 건 너무 무리를 한 탓이다. 건강의 중요성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지. 운명이 아니거든. 생각할 수 있는 머리만 건재하면 사람은 불행하지 않아. 옳게, 그리고 명랑하게 그러나 의롭게 살고 있다는 건 강하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거란다. 아빤 늘 네 곁에 있단다. 언제나... -엄마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요약해 근원적이고 총괄적인 이야기를 적고 싶었지만 아무 생각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전보다 명랑해졌고 큰 아이는 동생을, 동생은 형과 오빠를 위하여 사이좋게 노는 것 같았다. 종교에 의지하며 또한 생명의전화에 봉사자로 나섰다. 생활이 산만하고 요령부득의 생각이지만 내가 도움을 받았듯이 작게나마 봉사하고 싶었다. 불행한 사람, 말못할 사정, 불안 고민을 누구에겐가 털어놓고 의논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생명의전화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삶의 의욕과 신념을 갖고 살아 가도록 도움을 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참여하였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사연도,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슬픔도, 부모의 이혼을 고민하는 어느 고등학생의 고민도 나는 귀기울여 들어 주었다. 천주교 신자가 고해소에서 느낄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 은총의 능력은 아니더라도 생명의전화로 우린 친구가 되고 언니도 되어 의논하고 좋은 길을 찾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죽음이 주고간 상처는 세월이 보상해주고, 착한 인간성을, 밝은 인생관을 잃지 않도록 우리 굳게 마음을 갖자고.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진호, 국민학교 3학년인 일호, 그리고 막내 딸인 정일인 국민학교 1학년이다. 2남 1녀. 나는 삶의 대열속에 고통을 정복했다고 믿는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착실히 엄마노릇도 하여 나를 불살라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생에 대한 극도의 허무감과 일체의 영위에 대한 무가치감, 거기에서 오는 모든 의욕의 상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고독한 생활에 대한 염증과 절망감. 이런 여러가지 착잡한 심경과 절박한 처지에서 나는 그이와 나누는 일기를 쓴다. 1981년 9월 24일. 비가 내리며 날씨가 춥네요. 오늘은 더 스산한 것 같죠? 땅속으로 스며드는 찬물들이 당신의 육신을 적시리라는 소름끼치는 아픔을 내가 대신 느껴드리리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당신이었잖아요. 난 아이들에게서 당신을 봅니다. 당신과 나눈 이야기며 사랑까지도 생생하고 뚜렷하게 감각되어져 지낸답니다. 우린 아직 사랑의 종말을 고하지 않았음을 당신은 기억하시죠? 그럼...오늘도 안녕으. 나는 그 속에서 의욕을 찾고 꿈을 찾는다. 그리고 공동의 꿈을 지니고 그것을 이루기에 노력해본다. 그이의 무덤위엔 아이들이 심어 놓은 아름다운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나는 그이의 무덤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맑게 갠 푸른 하늘, 그이가 머문 그곳엔 새의 노래소리만 흥겹다. 나는 소리치고 있었다. 무로 돌아 간 것은 그의 육체이며, 그이와의 사랑은 나의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된 상처가 덧나서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 하면서까지 이글을 재정리하고 있는지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 의 슬픔과 아름답던 추억까지도 내 삶의 기록이고 현재의 삶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에 재정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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