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1월 우먼센스 원고청탁>
-저 하늘의 뭇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산더미보다 더 많은 황금을 준다 해도
당신의 사랑과는 바꾸지 않으렵니다.
솔로몬보다 더한 영화를 버릴지언정
나는 당신의 사랑을 버릴 수 없습니다.
태양이 서쪽 하늘에서 떠 오를 때까지
그리고, 저 하늘의 뭇별이 다 떨어질 때까지
나의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1961년 3월 11일 우용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즐겨 읽어 주며 위대한 사랑을 설명해 주던 그이,
우린 많은 어려움을 딛고 1968년 결혼식을 올렸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이보다 더 큰 아름다움이, 행복이 있을까?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발자국 소리로도 그날의 기분을 감지 할 수 있었던 부부였다.
남편은 서울법대를 거쳐,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68년도 졸업했다.
"공정거래 법안을 중심으로" <정부의 기업통제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제기획원을 시발로 공직에 몸 담아 재무부를 거쳐서 행개위에서 근무했다. 공무원에 대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던 남편은 개발도상국에서 공무원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며, 청렴결백을 누누히 강조하였다. 남편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서의 상식을 넘어, 성실과 겸손과 애정을 갖고 최선의 노력을 하며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기업이 벌어 들인 재산은 사회에 환원되어 빈부의 격차를 최소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이였다.
<자본가와 소비자간의 이해 조정과 일반 소비자 보호와 동시에 기업의 활동촉진과 나아가서 산업, 경제 전반의 건전한 발전과 국민 경제의 실질적인 향상에 기여되길 바란다>고 석사논문에서 밝혔듯이 그이는 생활 속에도 사회전반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계층간의 차이를 극소화하고 적어도 의료, 교육 등 인간욕구의 최소한을 충족시켜 주는 제도의 개발을 요구>하기도 하였던 그이였다.
물론, 가정에서도 자상한 남편이요, 사랑스런 세 아이들의 아빠였다. 때때로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새소리 지저귀는 비원 안에서 만나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직장으로 가기도 하였다. 생일축하를 어떻게 해 줄까고 밖으로 불러내 묻는 남편에게 여기서부터(중앙청) 집(정능)까지 걷고 싶다는 내 제의를 받고는 그것도 재미있는 추억이 되겠다며 기꺼이 응해 주던 이해심 많은 남편이었다.
어느 부부인들 그렇지 않을까 만서도 더없이 사랑했던 남편이요,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 부부의 의지대로 될 수 없었던것 같다.
1976년 당시, 행정개혁위원회에서는 정부의 서정쇄신과 법개정 등으로 눈코뜰사이 없었다. 남편은 업무의 폭주로 직장인지 집인지 구분이 불분명할 정도로 잠까지 설쳐가며 열심히 일했다.
잠을 쫓기위해 찬물에 발 담그며 집에까지 들고 온 업무에 시달리는 날들이 많았다.
'76년 3월 감기 한 번 앓지 않던 남편은 극도로 피로 해 하며 건강에 이상을 느꼈다. 그러나 바쁜 서정쇄신 업무의 폭주는 진찰받을 시간을 허락질 않았다.
겨우 틈을 내 서울대학병원 진찰실을 찾았을 땐 입원하여 정밀검사를 받자는 제의를 한용철박사님으로부터 받았었다. 그러나 내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어디 있느냐며 한사코 거절하였던 그이였다.
건강보다 업무가 더 중요한건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그때 상황으로나 책임감 강한 남편의 성품으로나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절약 시킬 수 있는 개인병원전문의에게 통원치료를 여러 달 받았으나 허사였다.
1976년 10월 들어서 나는 더 이상 남편의 의사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직장동료의 도움으로 서울대학병원내과에 강제입원을 시켰었다.
결과는 '림프관종', 위속의 24개의 임파관중 1개에 악성종양이 생겼다는 주치의 한용철박사의 진단이었다.
정신이 앗찔하여 쓸어지려는 나를 의사가 부축 해 주었다.
"정신차리세요. 환자 생각을 하셔야죠"
"네.....그래야죠", 가까스로 나를 추스렸다. 진찰실을 먼저 나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이가 내 얼굴을 보더니 깜짝놀라며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다그쳐 물었다.
"예? 왜요?"
"당신 얼굴이 백짓장 같잖아?",
"아닌데, 그렇게 보여요?" 위기모면을 하여야 했다.
병명을 안다면 그인 단번에 치료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이의 성품으로는 그랬다.
입원치료를 하는 5개월 여 동안에도 그이는 몇 번이고 "못고칠 병이면 치료를 포기하자" 고 말했다.
"나는 가도 남은 가족들은 살아가야 되지 않아? 당신과 의사가 나를 숨기는 것 같에" 했다.
어느날
"내가 암이라고 하면 집 사람에겐 비밀로 하고 나에게만 알려 주시오" 라고 부탁하더라는 주치의사의 전언을 들었다.
당시는 의료보험 제도가 없었고, 암치료약도 비쌌고 수입품에 거의 의존하던 때였다. 경제적인 압박감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안타까워 하였다.
"공무원의 생활이 빤한건데 아이들과 살아갈 걱정도 해야되지 않는가" 염려를 하며
"치료를 이제 그만 포기하지요" 라고 나를 설득하는 한용철박사님이었다.
"저는 1%의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 할겁니다. 치료포기는 간접적인 살인 행위가 아닌가요?" 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여 원자력병원(당시서울대학병원방사선치료시설이 없어 원자력병원에의뢰)에서 방사선치료까지 받게 되었다.
생명의 연장이라도 시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 하겠는가.
사형선고 받은 남편에게 병명을 속여가며 1%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보려던 안간힘, 길고 긴 투병생활, 감추인 설음은 서울대학병원 돌담을 끼고 돌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꿈엔 자기가 암이라고 주치의사가 알려 주더란다. 하여 내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떠나는 꿈을 꾸었다고도 하였다.
여윌대로 여윈 모습, 살릴 수는 없을까?
생명을 대신 할 수는 없을까?
그 상황에서 무엇인들 못해 주겠는가?
그이는 피주사 1병, 링거 2병, 아미노푸신 1병, 짜여진 스케쥴대로 매일 매일을 지탱해 갔다. 그러나 가래가 끓고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77년 2월 18일, 그날은 설이었다고 생각된다.
아주 조용한 새벽 5시, 전과 다름없이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서로를 위하여.
그러나, 나는 그날 최종적으로 사실을 밝히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편도선에 온 2차 전이에 이어 오늘, 3차 전이된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비로소 치료를 포기하였다.
내가 어떤 사랑으로도 그이의 종말의 번뇌와 괴로움, 슬픔을 위로 할 수 없었다. 어떤 언어로도 요절되는 남편의 고뇌에 비교되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정리를 시키고 싶었다.
가슴에 맺힌 서러움을 억제해 가며 아주 차분하게 조용히 말해 주었다.
소생할 가망이 없음과 이제까지 숨겨 왔던 병명까지도.
"이미 각오한 일인데 뭘, 그러나, 당신 어떻게 살아가지? 너무 힘겹게 살지 말어, 당신을 청상과부를 만드는 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이구나, 미안하다",
남편의 첫 마디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이 세상에 한 번 왔다가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인걸, 먼저가고 나중가는 차이일뿐, 이렇게 당신도 나도 의사선생님도 모두 힘을 합쳐 고쳐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안됐는걸.................그리고 아이들 명랑하게 키워, 장례준비도 서서히 해, 집이 비좁으니까, 책장을 마루로 내 놓고 집도 대충 정리하지"
그이는 단숨에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동안 참고 견뎠던 울음을 터트려 놓고 말았다.
"바보같이, 울긴 울지마, 당신이 이러면 내 마음 편치않어?"
생에 대한 애착이 없을 그이도 아니련만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내 마음이 평화로워 지도록 기도 한다던 그이,
얼마남지 않은 생, 잠시 머물러 있을 그이를 의식하고 침묵을 지키는 문병객들에게
"나에 대해 개의치 말고 보통때와 똑같이 세상돌아가는 예기 나누며 놀다들 가십시오"
라고 마음쓰던 그이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고통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며 죽음도 하느님의 섭리라고 말을 하던 그이였다.
일찍 아버님을 여위고 어려운 생활고에도 큰 형님은 당신을 위하여, 너무 철저한 자기 희생으로 서울법대와 행정대학원까지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어떤 일로도 형님의 희생과 견줄만한 일을 못하고 가게 되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던 그이였다.
1977년 2월 22일.
"오늘 퇴원을 할까요?"
"음, 당신이 알아서 해, 내 생명 이미 당신한테 맡긴제 오랜걸, 뭘"
산소 호흡기를 떼어야 하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임종을 병실에서 맞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 하룻 밤이라도 집에서 같이 보내려고 퇴원을 서둘렀다.
퇴원을 하기 전 그이는 아이들 교육방침에 대한 유언을 하였다.
"1. 그룹활동을 시켜라.
2. 체육관 같은 곳에서 몸단련 시켜준다(태권도, 당수 등)
3. 명랑하고 밝게 크도록 생활분위기 만들어 줘라.
4. 좀 자라면 보이 스카웃에 들도록.
5. 되도록 발표력 길러 줘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6. 대학을 무리해서는 보내지 마라.
앞으로 20년 후.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대학을 나오지 않드라도 전문적인 기술을 익혀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사는 시대가 올 것이다.
위의 사항은 진호, 일호, 정일에게 동일하며 일호에게 특히 관심있게 해 줘라. 네게도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줘라. 일호키우기가 힘들 것이다. 진호, 일호, 정일, 이 애들이 열살이 넘으면 자기 아빠가(이 대목을 말 할 땐 목이 메어 몇 번을 울먹였다)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고민하고 그럴 때 잘 타일러라. 당신은 모른다. 아빠없는 아픔을, 정일이는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연애 소설 그런것 보다 세계위인전 같은 걸 보도록........."
그리고, 그는 내게
"당신 그 동안 행복했어?'" 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네" 했다.
"그럼됐다. 나도 행복했어"
남편으로서는 마지막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또
"무거운 짐 다 지우고 먼저 가는구나, 여보 미안해 고생만 시켜서, 정말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란 말만 수없이 되풀이 하였다.
"여보, 그게 무슨 상관예요, 당신만 생각해요"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이다.
병명을 알려 줬다는 소식을 듣고는 간호사가 들어와 눈물을 글썽이며,
"박선생님, 어떻게 해요" 하였다.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하며 그이는 악수를 청하였다.
한용철 박사님에게도
"그간 감사합니다"고 인사하는 그이의 등을 두들겨 주며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확고한 신앙 안에서의 사생관을 지닌 그이의 초연한 모습과 겸허하게 죽음을 사실로 받아 들이는 그이를 바라보는 많은 문병객들
"저 사람 사람도 아냐"
라고들 했다.
오전 11시경, 한박사님의 배려로 앰블런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였다.
연로하신 시어머님의 통곡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 마자 그이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에, 성당에 연락하여 신부님 모셔오지"
하였다. 그리고 직장 동료들에게 악수를 나누며
"고마웠습니다" 하였다.
김과장이 울면서 "형님, 자주 못 찾아 뵈어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였다.
"음, 아니, 나는 그보다 더한 모든 사람을 용서하여 주었는데"
웃음 띤 모습으로 말했다.
"나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임을 확실히 믿고 먼저 갑니다. 잘들 계십시오"
라고 말하며 오른 손을 들어 주던 그이였다.
"이제 숨이 차서 말 않할꺼...."
그이가 맺지 못한 마지막 말이었다.
김과장 울먹이며,
"형님 업적으로 봐서 순직으로 처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 교육비 걱정은 마십시오"
숨 넘어가는 남편에게 마지막 준 위안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죽음 문턱에 있는 그이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임종에 한 그 약속도 공직사회에서는 지켜주지 않았다. 이유는 암이라는 병명이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상태라서 위원장의 결재가 어렵다고 하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도록 촉구하였으나, 나 자신이 구차해 지는 것이 싫어서 포기하였다).
혜화동 성당 홍신부님의 임종기도와 봉성체까지 받들고 그인 희미해진 정신을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진영 시아주버님은 그이를 흔들며,
"니, 지금가면 안된다. 우용아! 큰 형님보고 가거라이"
하며 몸부림쳤다. 창원에서 큰 시아주버님이 도착하셨다.
"우용아! 이눔아야"
하시며 우시는 큰 형님 쪽을 바라보면서 그때 남편은 처음 눈물을 죽 흘렸다.
뭔지 말을 할듯 입술을 자꾸 움직였지만 끝내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안타깝고 애절한 마음이었다.
죽음직전까지 청각은 살아 있었던 것 같다.
그이는 발을 조금 들었다 놓더니 잡은 내 손을 힘없이 놓았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40년 6개월의 생,
안타까운 삶을 그렇게 마치었다.
"여보, 고통없는 천상에서 편히쉬세요"
나도 천상향해 가는 남편을 그렇게 떠나 보냈다.
오후 5시경이다.
"내가 죽더라도 절대 슬퍼하지 말아"
오른손을 들어 주던 남편 미카엘(세레명)은 영원히 잠들었다.
살려 달라던 울무짖음의 기구 소리도 이젠 멈추었다.
하늘로 부터 거절 당한 기구는 진한 고통으로 가슴에 와 멎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껏 믿었던 신에대한 부재를 실감하던 시기였다.
"당신께서 내게 지금 아무리 큰 사랑을 준다해도 남편 앗아기지 않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하늘 찌를 듯한 탄식의 음성, 신을 원망하고 통곡하였다.
불현듯, 무덤이 열리고 남편 미카엘이 살아 날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환상이었다. 허구였다.
세상의 모든것 다 잊고 싶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였다. 괴로움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잘 키우겠다고 그이와 한 약속, 아니 그보다 고아가 될 아이들의 생각은 나를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살이 죄가 된다고 신앙하던 내 마음에 대한 불필요성을 확인받고 싶었다.
생명의전화 다이얼을 돌려, 참고 견디었던 온갖 슬픔을 낯선 목소리에 털어놓고 체면불구하고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당시 따뜻하고 다정한 말 속에 삶은 죽음보다 영광된 것이며 나를 필요로하는 소중한 존재의 가치에 생각을 맞춰주고 있었다.
내게서 지나가는 수 많은 시간들, 영원한 삶이 있는 영원한 그곳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고뇌와 절대자의 섭리를 남편의 주검이 준 생의 유한성에서 인간의지의 한계를 실감 할 수 있었다.
결국,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모상에 존엄성을 부여하였고, 그러 하셨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 그곳으로 거둬들여 가신다는 사실 또한 신앙할 수 있었음을.
죽음의 유혹의 언저리를 방황하던 나를 이 지상의 밝은 태양의 따스함과 생은 문제해결의 과정임을 알려 주었다.
그런 속에서 성취감이 주는 기쁨도 맛보게 했고, 삶에서의 자살은 탈락이며 패배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나만의 삶이 아니었다.
9살 진호, 5살 일호, 3살의 정일, 삼남매의 어머니이며 이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아이들의 가슴에 죽음이 두고간 아빠의 빈 자리에 대하여 납득을 하지 못했다.
3살짜리 정일이의 손을 잡고 '대여장학금을 준 교육청'에서 요구하는 남편의 사망진단서를 떼러 서울대학병원을 갔었다.
"엄마, 엄마, 아빠 냄새가 난다. 엄마, 아빠 여기 있지? 아빠 만나러 왔어?"
병원을 들어서자마자 아빠 만나러 왔다고 팔짝 팔짝 뛰며 좋아하는 딸아이,
진단서를 떼고 손을 잡으며 집에 가자고 하였더니,
"으응, 엄마, 왜, 아빠 안만나, 병실에 가서 아빠보고 가자. 나두 찾아 갈 수 있어, 서 5동이야"
"으, 있지, 아빠가 지금은 계시지 않아"
"아냐, 싫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막무가내 아빠 만나고 가겠다고 소란을 떨었다.
병원 직원들이 과자를 사들고 와
"나중에 오거라" 하였다.
"싫어, 나는 아빠 만날꺼야. 집에 안갈래" 엉엉 울며 떼를 썼다.
둘째 일호도 남편 근무하던 행개위에 전화하여
"우리아빠 박우용씨 바꿔주세요" 라고 했단다. 바꿔주지 않는다고 누군가에게
"야 임마, 우리아빠 바꿔" 하더란다.
나는 산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아빠는 이곳에 계시단다" 알려 주었더니 일호는 묘지를 발로 쾅쾅차며
"아빠, 빨리 나와, 뭐해" 하며 "문이 어디야" 라고 묻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리다 한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왜 없었겠는가?
말이 없는 진호도
"나도 아빠가 보고싶고 그립지만 말만 하지 않을 뿐이예요"
"아빠, 아빠"를 부르며 울던 모습, 지금도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남편없는 내 슬픈 가슴은 스스로 달래고 어루만져가며 살 수 있다지만 자식에게 아빠없는 아픔은 견디기 힘든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당신모상대로 만드셨단다.
그렇다면 인간 모두에게서 하느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는게 아닐까?
인간 속에서 하느님을 찾듯, 아빠의 모습 또한 모든 사람들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진호야, 일호야, 정일아, 우리의 가슴속에 남기고 간 아빠를 우리가 사랑하듯,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감이 어떨까?
하느님이 우리곁에 늘 계시듯 아빠도 우리 맘속에 머물고 있음을 엄마는 믿는단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슬픔이란 우리 신앙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견디어 갈 수 있단다.
아빠가 가고 빈 자리가 있는 건 아빠는 건강보다 일에 열중하셨기 때문이란다. 건강을 쉽게 잃으리라고는 미쳐 깨닫지 못했든 거지.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아빠는 하느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시다고 확실히 믿으셨단다. 우리도 아빠가 지녔던 확실한 신앙을 지키며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고 모든 결과는 하느님섭리에 맡겨보자.
아이들에겐 어렵고 부족한 설득력이었지만, 조금은 전보다 이해하는 듯 하였다.
나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그리스도의 작은 도구로 생명의 전화에 상담봉사원으로도 청원하였다. 비중의 정도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고민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느정도의 정신능력으로 극복하느냐가 문제 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능력도 한계는 있으며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는 물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누군가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싶어짐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생명의전화는 그런 사람의 친구가 되어 절망하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삶의 의욕과 용기와 신념을 갖고 살아 가도록 도움을 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데 목적이 있다.
사랑이 주고간 상처로 통곡하는 어느 여인의 슬픔을,
한 줌의 흙으로 변하여질 육신지고 시한부 삶을 사는 고뇌찬 젊은이의 음성을, 이혼하고 자식그리며 방황하는 어는 모정의 가슴치는 음성도, 나는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천주교 신자가 고해소에서 느낄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 은총의 능력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친구되어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었다.
삶의 한계성이 주고간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영혼 갖은 자는 그리움지고, 생계위협을 타개해 나가야 하는거다.
청렴결백한 공무원의 말로, 우리 유족에겐 최소한의 생활 여유도 없었다.
삼남매와 더불어 생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으려고 전전긍긍하다 제품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몇달 가지 못하고 실패의 쓴잔과 짊어진 부채, 빈 주먹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받은 그이의 퇴직금과 장제비 까지도.
실패요인이야 경험부족이었지만, 그때 실패가 준 또 다른 절망감,
"지게품을 팔아서라도 돈 벌어다 주는 찌그러진 남편이라도 있는 여자는 행복하다"
실의에 빠져 던진 말이었다.
어떻든 나는 그때의 실패가 삶에 더한 의욕을 갖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임종시 그이가 부탁하였던 태평양화학의 김박사님을 찾아갔다.
빈 주먹이었으나, 남편의 동료 김종성과장(재무부)의 배려로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고, 5평1홉2작의 작은 점포에 태평양화장품특약점을 받고 양품을 진열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지고 있던 또 다른 십자가에 하느님은 사실로써 나타나시어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은총의 의미를 깨닫게 하였다.
처음 경험 부족으로 서툴러 눈물 흘린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러나, 열심히 그리고 충실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당시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진호가 대입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고도 서울대학교에 낙방 하였을 때(첫 해는 합격, 과가 마음에 들지않는다며 재수), 부모심정이야 다 마찬가지겠지만, 고뇌하며 안타까워 하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보며 가슴 찢어지는 마음이었다.
내가 얼마나 더 깨어지고 부서져야 신께선 나를 붙들어 주실까?
그러나, 내가 믿는 신께선 내가 지금보다 더 깨어지고 초라해 지길 바랄 만큼 잔인하거나 부당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는 그때 모든 희망이 무너진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주저 앉거나 좌절하진 않았다.
다시 도전하여 보자며 위로와 용기를 진호에게 불어 넣어 주었다.
진호 또한 책상앞에 문제지 펴놓고 다시 앉아 공부하는 모습으로 나에게 위로를 주었었다.
초라한 우리를 통하여 주님은 어떤 뜻을 이루시려는 걸까?
손자의 대학 입학을 기다리시던 시어머님께서는, 남편의 생일에 드리는 연미사날 급작스레 쓸어지셨다. 건강하셨었는데 뇌출혈로 쓸어져 계신걸 병원으로 모셔갔었으나 결국 돌아 가셨다. 조금만 더 사셨드라면 애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차선책이었으나 진호가 대전 한의대에 합격하였다.
"오! 주님께 감사"
나에게 깊은 신앙을 심어주시던 신부님의 말씀이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지금은 병역의무로 휴학하여 512부대 방위병으로 충실히 근무 중이다.
당시 5살이던 일호, 서라벌고등학교 3학년 재학중이다. 물론 어렵고 힘든적이 몇 번 있었으나 지금은 그 아이도 대입준비에 여념이 없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그 또한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그때 나이 3살이던 딸 정일이도 많이 자랐다. 상계고등학교 1학년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준다. 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저토록 자란 아이들을 바라 보노라면 대견스럽고 가슴이 찡하여 온다.
때때로 허무와 고독, 뭉겨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인생 무상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나 죽음 앞에 순명하며 미안하다던 남편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더한 용기를 주기도 한다.
지금도 정상 궤도에 올라 서기 까지 엔 남편과 살아 온 세월보다 또 더 많은 날들이 지나야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선 구비구비 높낮은 현실적인 생의 고갯길을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 해 가도록 은총을 주고 계심을 신앙한다.
그건 많은 현실 체험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도 내 능력으로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도 저도 할 수 없던 절박한 상황이었을 때, 미 분양 아파트를 내가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신앙에 의해 고통을 정복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삶이 이어지는 한은.
내 모든 소중한 삶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최선의 노력을 한다.
결과는 신의 섭리에 맡기는 삶을 산다. 그리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고통있는 이들의 친구로 머물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세 아이의 교육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터가 있는 이곳 작은 점포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일터가 있다는 것은 기쁨이요, 축복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 해 주시는 신부님과 은인들, 나의 점포를 먼 곳으로 부터 가가운 곳에 이르기 까지 찾아 주는 고객들에 대하여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해가 거듭하고 아이들이 성장해 갈 수록 가슴 뭉클해 지는 진한 정으로 가슴에 와 멎는다.
모든 은인들에 대한 보답은 내가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이 있었기에 고통을 이해 할 수 있는 마음,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머물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인간들 속에 내재해 계신 주님도 만날 수 있었고, 남편과 나눈 많은 이야기, 사랑까지도 생생하고 뚜렷하게 감각되어져 건강하게 자라주는 아이들 속에서 의욕을 갖고 희망을 찾으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공동의 꿈을 지녔던 우리 사랑의 실천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작은 도구로 머물러 본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 간건 그이의 육신뿐, 그의 영혼과 사랑은 아직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남편이 그리다 놓은 꺾여진 붓을 들고 미완성의 작품에 아름다운 색체와 기쁨넘치는 우리의 마음과 사랑까지 그려 가면서, 만용이나 과욕부리지 않고 순리의 삶을 살아간다.
끝없는 기다림의 세월속으로 저 하늘의 뭇별이 다 떨어지는 날 까지.
이 모두가 신앙안에서 내가 받은 은총이요 축복임을, 기쁨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모두에게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심연 깊숙히 묻혀있던 14년전의 아픔들이 나를 슬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미력한 글을 통하여 고통받는 이웃,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질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슬픔을 무릎쓰고 기꺼이 썼습니다.
1990년 10월 17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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