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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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
“사람은 일할 수 있고 남 도울 수 있을 때까지만 살면 좋죠” |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
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 기사 게재 일자 : 2010-10-29 13:44 |
김형석(90·철학) 연세대 명예교수는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에세이로 지친 영혼을 위로해준 우리시대의 대표적 멘토다. 1960, 1970년대 그가 펴낸 수많은 에세이집은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삶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읽을거리가 많아지면서 그의 글이 갖던 절대적 영향력은 차츰 약화됐고 그 또한 대학강단에서 정년퇴임하며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원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당 조만식 선생 추모 60주기 및 전기 출판기념회에서 ‘고당에게는 꿈이 있었다’는 추모 강연을 했고, 11월9일엔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년 추모 모임 강연자로도 나설 예정이다. 지난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가을 햇볕처럼 따스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어느덧 중년이 됐지만 그는 구순이라는 연세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단아한 노철학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정년퇴직하신 게 벌써 25년 전인데, 정말 건강하시네요.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항상 조심하면서 사는 습관이 붙었지요. 지금도 무리는 안합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리는 것 같은데 나는 좀 생각이 달라요. 건강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앓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늘 무리하지 않고 지냈죠. 무슨 일이든 쫓기지 않으며 하려고 노력합니다. 원고나 강연을 청탁받으면 마감날짜 4∼5일 전에 끝냅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긴장을 덜 하고 살아온 게 건강 비결인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맡은 일도 미리미리 한다는 그는 매일 아침 50분씩 산책을 하고 오후엔 수영을 한다. 그것도 지나치지 않게 한다. “더하고 싶을 때 딱 그만둔다”는 게 그의 말인데, 평생 조심하면서 준비하고 절제하며 살아온 습관이 그의 오늘을 만든 듯싶다. 김 교수는 “얼마전 원고청탁이 들어왔는데 사람이 얼마나 사는 게 좋으냐는 게 주제였다”면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사는 게 좋으냐를 생각하며 쓰다가 얻은 결론은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사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원고를 쓴다. 한땀한땀 바느질하듯이 정성을 다해 생각을 모으고 글로 옮긴다. ‘컴퓨터로 쓰면 손의 피로도가 덜할 텐데 여전히 손으로 쓰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만년필을 들고 원고지 앞에 앉으면 생각이 한곳으로 모아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마치 성직자가 기도하듯이 구도하는 자세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는 최근 서울아산병원에서 펴내는 잡지 ‘아산문화’에 두고온 북녘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마침 이번 주말부터는 금강산지역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예정돼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글은 실향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북녘의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고향의 가족에 대한 기억은 어떠신지요. “나는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고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서 성장했어요. 북한에 누님과 누이동생, 사촌이 있는데 저쪽에서 내가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만나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한번도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그의 표정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1947년 월남한 이후 행방을 모르고 살아온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났지만 이내 학자적 냉정함을 찾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8·15 해방을 북한에서 맞고 2년여 북한체제를 경험한 뒤 1947년 월남했다. 이후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 뒤 1954년 연세대에서 철학과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철학자 겸 수필가로 이름을 날린 것은 1961년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펴내면서부터다. 1960, 1970년대 문학평론가인 이어령 당시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했는데 빼어난 수필을 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얘기했다. “연세대에 오기 전에 중학교에 있었는데 내 꿈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모범적인 사립학교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게 20대 후반의 내 목표였고 일찍이 중학교 교감도 됐지만 자의반 타의반 연세대로 오게 됐어요. 7∼8년 동안 정열을 갖고 가르쳤던 아이들을 만나보면 애들을 버리고 떠난 부모 같은 심정도 들고 해서 그 애들과 대학초년생들에게 뭔가 주고 싶어 ‘고독이라는 병’ ‘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쓴 것입니다. 특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1961년 여름 미국으로 교환교수로 가기 전 서문을 써주고 갔는데 이듬해 귀국해서 보니 제가 그 책 덕분에 많이 유명해졌더군요.” 1960년대 초 발간된 그의 철학 에세이를 읽은 독자들은 이제 50, 60대 장년층이 됐다. 10년 전 그가 울산으로 강연을 갔을 때 초로의 신사가 다가와서 “선생님께서 우리의 20대 젊은 시절을 키워주셨어요”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울먹인 일도 있다. “제 책의 독자들은 60대가 제일 많습니다. 지금도 강연을 하면 내게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분들이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때 받은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나나 안병욱 선생이나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썼지만 그 시대(1960∼1970년대)엔 우리의 글이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글은 인간 존엄성과 가치관,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 등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 때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조사도 받았고, 전두환 정권 때엔 강연이 취소된 적도 있다. “박정희 정권 때 학생들이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김찬국 연세대 신학과 교수와 함께 나섰는데 나는 ‘자유의 조건’을 강연 제목으로 제시했어요. 그런데 기관원들이 와서 ‘자유’를 주제로 한 얘기는 곤란하다며 방해해 강연 자체가 취소된 적이 있어요. 나는 그때 사회적 현실에서 역사를 바꾸는 자유는 투쟁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죠. 이성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유를 말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게 핵심내용이었는데 기관원들의 공작으로 불발됐어요.” 그는 박정희 시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준 대중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1985년 9월 연세대에서 정년퇴직할 때 고별강연을 했는데 그날은 마침 대규모 시위가 예정된 날이었다. 학교측은 시위 때문에 강연을 미룰 것을 검토했으나 김 교수는 강연을 강행했다. 그런데 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시위 도중 하나둘씩 강의실로 들어왔고 강연장은 이내 최루탄 범벅이 된 채 입장한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런 상황에서 김 교수는 고별강연을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내가 연세대에서 잘못 살지 않았구나 싶어 고맙게 생각됐다”고 말했다. 그는 늘 가치지향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자유의 중요성을 얘기했을 뿐 1970, 1980년대 참여지식인들처럼 투쟁적인 언어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날 인터뷰에선 우리 역사 속에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위상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얘기했다. “나는 일제강점기 때 유년기를 보내고 20대에 해방을 맞으며 6·25와 4·19, 5·16을 거치며 살아왔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슬펐던 때는 역시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때부터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을 하기 전까지입니다.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그 같은 암흑기가 반복돼서는 안됩니다. 그때 저는 조용히 살았지만, 하룻밤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때에는 지성인까지 침묵을 지키면 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역사의 암흑기였던 전두환 시대가 끝날 즈음 그는 대학강단을 떠났고 이후 20여년이 흘렀다. 그는 요즘 고민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민족의 앞날에 대해 많이 걱정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에는 여러 가지 어렵다고 해도 인생이 뭐냐, 가치관이 뭐냐를 추구하며 살았고, 박정희 시대 후반기부터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쏟았습니다. 그런데 민주화한 이후 요즘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자리가 잡혀가지만 좌우 대립은 여전한 듯합니다. 지금은 자유와 평등보다 높은 것, 진보와 보수보다 높은 것이 필요합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 추모 강연 때도 얘기했지만 선진국에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이미 다 끝났습니다. 보수가 열린 사회로 가면 지지하고, 진보가 닫힌 사회로 가면 반대해야 합니다. 소련은 좁은 사회를 추구하다 망했고, 북한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열린 사회가 필요합니다.” 평생 자유로운 지성으로 살고 싶었다는 그는 “젊은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그래야 우리 민족의 길이 열릴 수 있다”며 강의와 같은 긴 대화를 마쳤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 차장 musel@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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