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교육

아우를 2014. 12. 5. 21:47

   -1978년도에 쓰신 연세대학교의 명예교수 김형석교수님의 논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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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近代化와 基督敎 敎育

                        

金 亨 錫

           

崇 田 大 學 校

                              

1978년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교육

                                                   

金 亨 錫*

         

1.서론

2.近代化의 普遍性과 特殊性

3.開化期와 基督敎學校

4.基督敎 學校의 敎育理念에 관하여

5.韓國의 近代化와 基督敎的 價値觀



1. 서 론

   우리나라의 精神史를 더듬어 보면 두 차례의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 첫째는 高麗末에서 朝鮮王期로 넘어올 때였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佛敎精神을 가지고서는 國家의 活路를 찾을 수 없으므로 새로운 정신과 價値觀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기대를 채울 수 있으리라고 믿어진 것이 儒敎의 精神이었다. 그 결과가 世宗文化를 형성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따라 朝鮮期 말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둘째 번 변혁이 요청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現在와 같은(儒敎傳統) 정신과 價値觀을 그대로 계승한다면 우리 民族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다는 긴박한 정신사적 위기의식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王室과 관의 위치보다도 자각이 있는 知識人들의 일반적이면서도 간절한 요망이었다.

   쇄국정책이 풀리면서 西歐文物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우리보다 한 보 앞서 西歐文明을 받아들인 인접 국가를 찾아 본 뜻 있는 人事들의 공통된 정신적 경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옛날에는 佛敎에서 儒敎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朝鮮期 末에는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함이 말없는 과제로 등단했다. 여기에 나타난 일반적인 요망이 西歐的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서구적인 것과 동시에 받아들여진 것이 基督敎 精神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狀況은 거의 전 국민적인 것이었다. 당시 國民들의 思想과 言論을 지도해 온 獨立新聞에서도 ⌜淸國에 四書三經을 잘 아는 사람이 조선보다 많이 있고 토지와 人民이 조선보다 더 크되, 구라파 속의 청국의 십분의 일 밖에 못되는 나라이라도 세계에 대접받기를 청국보다 십 배나 더 받고 정부와 백성이 백배나 강하고 부유하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구라파 각국에서는 적든지 크든지 人民들이 남녀 없이 적어도 십여 년을 학교에서 각색 새 학문을 배운 연고요, 청국은 그저 오랜 四書三經을 공부한 까닭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는 그 창간호에서 ⌜우리 동포 형제들아 東洋史籍만 좋다하지 말고 선대의 하시던 일만 옳다하지 마오....⌟라고 전제하면서 만국이 교제하는 때를 당하여 세계상의 유익한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 및 사회적 작업을 성취시키려는 운동이 두 가지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이러한 운동을 國 · 官 과 더불어 시작했으나 知識人層에서 더 강하게 전개시켰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脫儒敎的인 精神風土에서 조성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은 당시에 일어난 言論機關의 탄생과 學會 및 思想團體들이 조직되어 정치와 사회의 정신적 기풍을 바로 잡으려는 기풍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그 뜻을 펴려고 노력했고 또 성공시킨 것은 새로운 敎育의 보급이었다. 그리고 學校敎育과 더불어 성장하게 마련인 새 學問에의 연구 활동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크게 주목할 만한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해결 지으며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基督敎가 광범위하게 傳來되었다는 사실이다. 開化 초창기의 대부분의 정신적 운동이 西歐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일어났으며, 基督敎가 안겨준 자극이 측면적으로 民族精神의 계발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基督敎가 그 책임을 감당한 전부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役割을 담당했으며 그 영향력은 비할 데 없이 컸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基督敎가 西歐를 近代化시켜 준 精神的 지주였다는 점과 당시의 한국 지성인들은 西歐的인 정신을 요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윤태림 교수도 天主敎를 논하면서 ⌜·····같은 天主의 자녀라는 사상 밑에서 평소의 불만, 억울함을 풀 수가 있었고 계급적인 의식 밑에 구성되었던 유교에 반발하고, 현실의 부조리에 낙심한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신앙을 통하여 불붙여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으며 프로테스탄트를 평하면서는 ⌜이들은 순수한 신앙 선교사업보다도 교육·의료·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직접 민심을 잡았고 일본이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을 강압하고 있을 때 학교에서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기독교 청년회 등을 통하여 민족의식과 아울러 미신 타파, 남녀평등, 금주운동 등을 전개함으로써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 더불어 사회개조에 큰 힘을 미쳤던 것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基督敎가 끼친 韓國 近代化의 意義는 막중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自他가 공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韓國의 近代化를 위해 시대적 중책을 맡았던 基督敎가 어떤 책임과 역할을 감당해 왔는가. 우리는 그 문제를 주로 敎育的인 측면과 價値觀의 형성 면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기독교의 교회적 측면에 관해서는 이미 연구된 바가 있으며 지금의 우리로서는 취급할 단계가 아니다. 그러나 基督敎精神과 價値觀에 있어서는 敎會와 敎育이 공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서만은 약간의 연관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近代化의 普遍性과 特殊性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이끌어가기 이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精神 및 價値觀에 있어 近代化가 무엇을 意味하는가 함이다. 이 문제를 남겨둔 채로 韓國의 近代化만을 立論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일방성에 치우치는 과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략하게나마 近代化의 意味를 모색 · 설정해 보려는 의도가 여기에 있다.

   近代化는 歷史的 槪念이다. 그리고 그것은 世界史的 意味를 갖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西歐社會가 먼저 개척해놓은 近代化의 정신이나 업적을 도외시 하거나 그것과 무관하게 韓國의 近代化를 논하는 것은 妥當치 못하다. 자칫하면 近代化의 方向이나 과정을 상실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世界史的인 보편성 속에서 韓國的 特殊性을 고찰할 때 그 내용이 밝혀지며 未來를 위한 과제가 뚜렷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問題로 삼고 있는 것은 基督敎 精神에 대한 올바른 價値觀的 批判도 가능해진다.

   西歐의 近代化는 五 世紀에 걸쳐 이루어진 역사적 과제였다. 그것이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文藝復興과 宗敎改革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현제에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그러면 이 五 世紀에 걸친 精神的 運動의 主流를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많은 學者들의 이론을 빌어 다음의 세 가지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는 Humanism의 육성과 성장이다. 그 둘째는 科學精神의 生活化였다. 그리고 셋째는 近代文化의 創造가 뒤따른 일이다. 이 셋 중의 어느 하나라도 실패한 사회는 近代化를 성취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世界史的 過程에서 이 세 가지 과업을 이루어 놓은 國家는 모두가 近代社會를 성취시켰던 것이다. 대표적인결과를 우리는 우선 西歐社會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Humanism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文藝復興과 宗敎改革을 西歐 近代化의 嚆矢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運動을 일으킨 저류가 다름아닌 人間回復 및 人間에의 復歸運動이었다. 古典에의 연구가 바로 人間性회복의 노력이었고, 宗敎改革의 대표자인 M.루터가 良心의 自由를 주장한 사실이 바로 이 뜻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 뒤에도 유럽에서는 계속해서 啓蒙主義, 로망主義, 功利主義. 民主主義, 實存主義 등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정신운동을 이끌어 온 것은 그 밑에 깔려있는 Humanism의 정신이었다. 最大多數의 最大幸福을 뜻하는 功利主義도 결국에 있어서는 Humanism의 理念化였음을 알 수 있다. 基督敎 精神이 Humanism을 기본바탕으로 삼고 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科學精神의 生活化도 그렇다. 우리는 西歐化는 科學化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科學은 西歐社會의 獨占物같은 인상을 준다. 近代社會 초창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自然科學이 현재까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7世紀를 중심 삼는 大陸의 合理主義와 英國의 經驗主義는 演繹과 歸納의 方法을 제시해 주었다. 19世紀 중엽에 이르러서는 선진 국가들이 제각기의 社會科學을 開發했다. 독일에서는 마르크스主義가 나왔고, 프랑스에서는 A. comte의 實證主義가 탄생되었는가 하면 英國에서는 功利主義 思想이 완숙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 흐름이 19世紀末에서 20世紀로 접어들면서는 機械와 技術의 급속도의 성장을 보아 오늘의 메커니즘 社會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科學精神이 결여된 近代化란 생각할 수 없는 실정이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도 全國 敎育者 大會에서⌜全國民의 科學化⌟를 口號로 채택했을 정도였다.

   近代文化라고 부를 수 있는 新 文化의 創造도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中世紀의 라틴語 文化가 끝나면서 여러 國家들은 제각기의 言語를 통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간다. 言語의 발견은 새로운 民族 얼의 발견과 통한다. 이에 뒤따르는 운동은 古典에 대한 批判이다. 近代 初期에 일어 난 基督敎 古典과 一般古典에대한 批判的硏究는 새로운 文化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社會마다 새로운 統一된 價値觀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學問, 思想. 文藝 운동이 전개되었다. 우리가 西歐社會에서 흔히 부르는 ☓☓主義나 ☓☓運動이라고 호칭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 대신 이러한 文化運動에 참여하지 못했거나 新文化를 창조하지 못한 國家는 역시 近代化의 대열에서 낙후된 社會들 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좀 더 깊은 關心을 모은다면 西歐社會에서는 이러한 近代化가 먼저 人間과 精神面에서 이루어졌고 그후에 社會的 側面 즉 政治나 經濟에서 기반을 굳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결과가 오늘의 메커니즘과 經濟的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人間(精神)開發. 社會開發 그리고 經濟開發의 순서를 밟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 세 가지 精神的 要素가 西歐社會가 이미 성취시켜 놓은 近代化의 중심과제였다면 韓國의 近代化도 이 世界史的 보편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물론 서구적 근대화의 意味와 不當性을 그대로 肯定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近代化의 精神이 世界史的意味를 갖는 것이라면 우리만이 그 與件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밑에서 한국의 近代化와 基督敎 精神을 살펴봄이 더욱 타당하며 明確性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보든지 우리나라의 近代化는 19世紀 中半期에 움트기 시작하여 그 末葉부터는 확연히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일련의 사태들은 政治 社會 思想 전반에서 동일한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데도 그 特色이 있다. 그러나 西歐의 近代化가 自律性을 지닌 것이라면 우리의 경우는 他로부터 要請 당한 인상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창조적이기 보다는 被動的인 환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精神的 운동은 이미 中國과 日本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中國의 自强運動이 그것이었고, 日本人들이 文明開化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 같은 내용의 것이다. 自强이라는 뜻도 西歐의 세력에 접했고 그 侵略性을 느꼈기 때문에 얻은 생각이며, 모방력이 강한 日本民族은 文明開化 그 자체가 西歐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韓國의 近代化에 해당하는 精神은 開化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어 왔다. 李光麟 교수의 고찰에 따르면 우리의 開化精神은 開國과 더불어 불붙기 시작했다. 그 순서는 外國知識이 들어온 단계, 技術富强을 뜻했던 단계, 國權 및 民權을 확립하려는 단계를 밟아 육성되었으며 그 源泉에는 두 가지 要素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實學에서 利用厚生의 精神을 계승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西歐的인 文物의 영향 및 導入이었다. 어쨌든 우리의 開化運動 속에는 更始, 改革政治, 文明化, 富强化 등이 요청되고 있으나 그 정신적 배경에는 人間能力의 開發과 그 次元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는 계몽주의적 사고가 깔려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명칭과 개념을 사용했든지, 西歐의 近代化는 한국의 開化精神과 통하고 있으며, 그 뜻이 19世紀 末에 뚜렷이 나타나 現在에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의 近代化작업이 어떤 방향을 택하며 무슨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가, 함이다.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도 여기에 있으며, 基督敎 精神과 敎育의 내용도 동일한 과제 밑에서 취급되어야할 것이다. 近代化를 위한 價値觀의 문제가 우리의 意圖이기 때문이다.



3. 開化期와 基督敎學校

   우리나라의 近代化를 촉진시킨 가장 중요한 運動은 교육의 보급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 19世紀末 즈음의 사회풍토와 言論界를 살펴보면 그 현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憲法이라고 볼 수 있는 洪範 14條를 펴내면서도 그 11條에 [國中의 총명한 자제를 널리 파견하여서 外國의 學術과 技藝를 傳習시킨다]라고 명시했으며 그 다음 달이 1895년 2월에는 敎育詔書를 내린 바 있다. 거기에도 [....世界의 형세를 두루 살펴 보건데, 富하고 강하며 독립하여 雄視하는 모든 나라는 다 國民의 지식이 開明하였다. 이 지식의 개명은 敎育의 善美로 되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朕이 君師의 자리에 있어 교육의 책임을 스스로 맡노라. 또 敎育은 그 길이 있는 것이나, 헛된 이름과 實用을 먼저 分別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실정은 당시 政府의 의도였으나 知識層의 要望은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최초로 설립된 學校가 官立으로서는 外國語습득과 통역을 위한 同文學이었고, 私立學校로서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元山學校다. 둘 다 1883年에 건립되었으나 10여년이 지난 1895年부터는 官 · 私立 모두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關心을 모으는 것은 1886年부터 시작되는 基督敎 學校의 설립과 확장이다. 同年에 세브란스 前身인 廣惠院, 培材學堂, 儆新學校(후에 延禧大學部 포함) 梨花學堂이 설립되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最初의 大學들(세브란스, 梨花, 崇實, 延禧, 平壤神學校)이 모두 선교사들에 의해 창설된 셈이며 平壤을 비롯한 全國에 基督敎學校들이 敎會와 더불어 設立되었다. 1910(韓日合倂)年까지 세워진 敎會學校만도 796敎에 달하고 있다. 그 중 666敎가 改新敎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長老敎에 속하는 학교가 501敎, 監理敎 소속이 158敎에 이르고 있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韓國의 近代化는 基督敎的 영향과 基督敎 學校에 힘입음이 얼마나 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일반 私立學校 중에서 基督敎界의 지도자들에 의해 세워진 學校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數는 훨씬 더 많아지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學校 중에서도 安昌浩의 漸進學校와 大成學校, 南宮檍의 峴山學校, 李承薰의 講明學校와 五山學校, 金九의 保强學校, 兪吉濬의 隆熙學校, 金鴻亮의 楊山中學校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特記해야 할 事項은 女性敎育의 出發은 基督敎學校로부터였다는 점이다. 舊韓末까지 14個의 女性을 위한 中等學校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 중의 梨花學堂이 최초의 女性敎育 機關이면서 大學으로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에 자극을 받아 私立女學校가 舊韓末까지 8個校가 設立되었으나 女性을 위한 官公立學校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開化期의 女性敎育은 거의 基督敎가 전담했다고 보아 잘못이 아니다.

   이제 舊韓末까지 즉 1883年까지 1910年까지의 學校現況을 살펴본다면 量에 있어서는 民間私立學校의 數가 多數를 차지하고 있다. 그 전체를 합친다면 3,000校가 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 質에서 본다면, 단 하나의 大學(普成, 現高麗大)이 있고, 47校가 中高等學校에 해당할 뿐이다. 이에 비하면 官公立學校는 전체, 88個校 중에 大學(漢城醫學)이 하나 中學이 19校, 특수학교(語學, 實業)가 8個校가 계속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基督敎學校는 大學이 5個校(神學校包含), 中高敎가 38個 學校에 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量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質에 있어서도 基督敎學校의 의의가 얼마나 컸는가를 쉬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가 韓國의 近代化와 基督敎敎育을 再考해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狀況이 1910年을 넘으면서는 그 판도를 다르게 한다. 日本의 본격적인 간섭과 탄압이 敎育界를 좌우하기 때문에 國民敎育의 主流는 日本에 대한 저항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그 저항의 내용도 官公立보다는 私立學校와 基督敎學校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平壤의 神學校, 崇實大學, 崇實中學, 崇義女中은 총독부에 의하여 교문이 닫힐 때까지 항일정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은 抗日精神에 있어 基督敎學校가 얼마나 강경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예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1945年 이후에는 모든 學校들이 큰 차이가 없는 敎育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基督敎學校는 초창기부터의 理念을 살려 宗敎敎育을 통한 人間敎育에 뜻을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4. 基督敎 學校의 敎育理念에 관하여

   開化初期의 學校들은 제 각기의 敎育理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뜻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敎育立國이라는 精神이었다. 다가 올 국운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에 國權을 바로 잡는 기본적인 운동을 敎育과 더불어 전개시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연히 거기에는 두 가지 要素가 뒤따랐다. 脫儒敎的인 敎育性格이 그 하나였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開化에의 參與였다. 그리고 當時의 開化는 民族精神의 啓蒙인 동시에 西歐的인것을 흡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두 가지 精神은 19世紀 末부터 성격을 바꾸어 가면서 오래 계승되어 온 셈이다. 國權에 關한 문제는 抗日敎育으로 지속되었고 서구적인 교육이 교육의 주류를 만들었는가 하면, 開化精神은 近代化精神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開化初期 學校들의 精神과 敎育理念을 더듬어 보면 거기에는 위에 언급한 공통성과 더불어 몇 가지 차이점들도 있었다. 官公立學校는 전통적인 實學精神을 계승하면서 西歐의 文物을 받아들이려는 뜻을 세웠다. 그래서 國家가 設立한 학교의 大部分은 당시에 필요했던 外國語敎育, 實業敎育, 師範學校 등에 치중했다. 國家가 해결지어야 할 긴급한 교육과제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특별한 精神이나 理念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먼저 소개한 敎育譯書에서도 교육이 三大目標를 德養, 體養, 智養에 두고 있다. [·····이 세 가지는 교육의 紀綱이니라. 朕은 정부에 명하여 學校를 널리 세우고 人才를 양성하며 그대들 臣民의 학식으로써 國家中興의 大功을 贊成케 하련다. 그러니 그대들 臣民은 忠君하고 愛國하는 心性으로 그대의 德과 몸과 智를 기를지어다. 王室의 안전을 그대들 臣民들의 敎育에있고, 國家의 富强도 그대들 臣民의 교육에 있다] 라는 결론은 官公立學校의 設立目的을 잘 밝히고 있다. 다른 國家에서도 볼 수 있듯이 國公立學校는 國民을 위한 일반교육을 책임 맡아야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일반 私立學校는 그 성격을 약간 다르게 하고 있다. 1905年의 乙巳條約 이전까지는 주로 開化敎育에 열중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主權을 위한 民族主義 敎育에 모든 힘을 모으게 되었다. 日帝의 탄압이 극심해질 때까지는 主權回復이 모든 교육의 중심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적절한 경우를 우리는 島山과 南崗의 업적에서 쉬 엿볼 수 있다.

   그러나 基督敎 學校의 설립정신과 그 영향은 위의 두 가지 처지와 다른 점들이 많았다. 그 첫째는 基督敎 精神에 입각한 信仰과 人間革新의 敎育이었다. 敎會에서 설립한 學校들은 敎役者와 전도자를 양성하려는 목적이 컸었다. 그러나 또 학교에서 배우는 성경과 계속해서 갖는 예배시간은 學生들에게 새로운 價値觀과 人生觀을 제시해 주었다. 그때까지 계승되어 오던 유교 및 불교적인 傳統에 대하여 강하게 항거하며 도전하여 새로운 精神界를 일깨워 주었다. 새로운 宗敎와 信仰은 언제 어디서나 강렬한 휴머니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基督敎 學校의 초창기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생생하고도 강렬한 휴머니즘 운동이기도 했다. 個人의 人權에 대한 존엄성과 平等意識을 당시의 基督敎 만큼 강조한 일이 그 때까지는 없었다. 만일 基督敎가 西歐 近代化에 미친 영향이 컸다면 동일한 基督敎가 韓國의 近代化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07年에 일어난 전국적인 大復興運動은 기독교 선교사상 世界的인 관심을 집중시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敎會復興이 아니다. 그 信仰運動의 배후에 깔린 自由와 平等과 사랑의 정신은 새 歷史를 창조해가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基督敎 學校의 주목할 役割의 하나는 女權運動의 신장이었다. 우리나라의 긴 歷史를 통하여 女性敎育과 더불어 女性의 解放 및 人間的 존엄성을 찾아 준 최초의 운동은 基督敎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다. 사랑에 의한 平等과 民主精神의 함양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社會運動이 아닐 수 없다. 身分을 무너뜨렸으며 계급의식을 해소시킨 정신적 계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基督敎와 그 敎育의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基督敎 敎育이 開化運動을 소홀히 했거나 民族主義 敎育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계몽정신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고취했으며 世界歷史와 世界地理를 통한 西洋의 文物紹介는 다른 學校에 뒤지지 않고 있었다. 비록 政府가 설립한 實業學校들이 직접 實科敎育을 담당한 바 있으나 기독교가 西歐의 科學精神을 醫學과 農學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일깨워 준 것도 특기할 사실이다. 기독교 학교가 초창기부터 토론과 연설대회를 자주 열었으며 中高等學校 學生들 까지도 방학 때는 지방순회강연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민중계몽의 큰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운동에 있어 球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도 기독교 학교들의 노력이었다.

   基督敎 學校가 敎會의 精神과 더불어 민족 및 民主敎育에 앞장섰다는 사실도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官立學校나 一般私立學校보다도 더 강하게 民族主義 敎育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의 美國政府는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日本이 韓國에 뻗치는 세력을 크게 문제삼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와 있는 선교사들은 福音과 敎育과 獨立을 동일하게 호소하면서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우리가 感謝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초창기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敎育을 담당했을 때 언제나 ⌜보다 나은 한국인⌟을 염원했다는 사실이다. 梨花學堂의 설립자인 스크랜톤부인은 ⌜우리의 목표는 女兒들을 외국인의 生活,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듦으로써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 라고 말했으며 그의 뒤를 계승한 L.C.로드 와일러도 ⌜·····이것은 모두 한국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을 만들려는 것이지, 외국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이 그들의 敎育理念이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韓國人에 있었다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높은 次元의 人間敎育을 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敎育理念과 그 結果를 입증해 주는 것이 바로 3.1運動 당시의 보고서들이다.. 日帝가 가장 위험시 했으며 탄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계속 基督敎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物的으로 가장 큰 被害를 입은 곳이 基督敎였으며 反日運動의 中心人物들은 대부분이 基督敎界의 지도자들이었다. 거기에는 확실한 원인이 있었다. 종교가 폐쇄적이며 敎權이나 敎會中心으로 排他性을 갖지 않는 한, 그 宗敎는 社會가 요청하는 自由와 正義와 人權運動에 앞장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基督敎와 3·1운동이 관련된 역사에서는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基督敎와 學校의 교육이념을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실예를 敎會學校와는 별도로 세워진 南宮檍의 牟谷學校의 경우에서 엿보기로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南宮檍은 舊韓末의 官職生活을 亡國과 더불어 끝내고 鄕里인 洪川으로 내려가 여생을 敎會와 敎育事業에 바친 人物이다. 그는 基督敎의 敎職者도 아니었고 전문적인 敎育者도 아니었다. 최초로 英語를 습득한 信仰人의 한 사람으로 民族의 장래를 敎育에 걸고 農村敎育에 헌신하다가 日帝 밑에서 희생당한 先覺者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06年 강원도의 峴山學校를 세운 바도 있으나 敎育精神은 주로 末年의 鄕里敎育에서 엿볼 수 있다. 1923年에 시작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學校를 운영하면서 직접 가르치는 책임을 맡아 왔다. 당시에는 마땅한 敎材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과서를 직접 저작해서 사용했으며 그 안에는 國語와 文法, 英語와 文法, 家事와 育兒法, 韓國史가 들어 있으며 音樂敎材까지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 당시 南宮檍과 같이 교편을 잡았던 사람들과 제자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의 敎育理念을 더듬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南宮檍은 敎育의 궁극적인 目標를 國家獨立에 이바지함에 두고 있었다. 국민들 각자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고 그 힘이 애국적인 자주정신으로 뭉쳐 잃어버린 主權을 회복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독립에 관한 회의나 위축된 정신을 배격하고 확신과 정열을 갖고 意志와 信念과 希望을 주도록 노력했다. 자주적인 긍지로 식민지 정책에 협찬하는 文化를 배격하고 민족적 정신의 함양과 계발을 촉구했다. 그 뜻을 실현키 위해 국어 교육과 비중 높은 역사 교육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교육의 성격은 지금 우리들이 따르기 어려울 정도의 全人敎育과 人格敎育을 택하고 있었다. 기억력에 호소하는 主知主義 敎育을 지양하고 情緖敎育과 實踐敎育에 높은 비중을 두었다. 音樂, 體育, 書道, 자수, 공작, 실업시간은 물론 직접 일을 했으며, 학교시간 이외에도 家庭과 마을의 농업 및 청소를 지도해 주었다. 그 자신이 음악에 관한 소양이 깊었고 자녀교육을 위해서도 정서의 함양이 얼마나 귀중함을 강조했다. 牟谷學校는 실제로 농촌생활 전반에 걸친 生活敎育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 전부가 校內 校外에서 직접 일하는 실천의 도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人格敎育은 自主獨立을 위하면서도 人道主義를 섭취 이해할 수 있는 고귀한 정신적 풍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文化의 均等과 人間的 平等을 敎育의 理念으로 생각했다. 女性敎育을 강조하여 언젠가는 男女의 平等한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官史였던 그가 일찍부터 女性敎育과 家庭敎育에 뜻을 두었던 것은 基督敎 精神의 所致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人間은 누구나 個性과 기호에 따라 文化와 敎育의 혜택을 받으며 제 각자의 성장과 참여의 길을 열도록 강조하였다.

또 그는 西歐文明을 일찍부터 체득한 사람이기 때문에 科學敎育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들의 生活은 항상 새로이 改造되어야 하며 發明과 創造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연의 책임이라고 가르쳤다. 科學은 우리들의 生活을 편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수단과 방편이므로 이론과 실제에 있어 중요한 교육의 부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외에도 南宮檍은 體力과 精神的 忍耐力 을 증진시키기 위한 단체훈련, ⌜내 마을은 내 손으로⌟라는 표어 밑에 근로봉사의 生活化와 副業指導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讀書會를 만들어 良書 읽기를 권장했고 토론회와 웅변회를 주기적으로 열어 話術을 익히며 간접적인 民族意識 고취에 뜻을 모았다.

   이러한 敎育理念과 實踐의 원동력이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그가 일찍부터 기독교 신자였으며 末年의 生活은 완전히 祖國과 하느님 밖에는 생각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부터 자수시간에는 무궁화 꽃을 수놓게 했으며 洪川에서 무궁화나무를 전국에 보급하고 있었던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鄕里에 돌아갔을 때도 먼저 敎會를 세웠고 일본 경찰에 의해 自由를 빼앗기는 때까지는 하루도 祖國의 獨立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가 임종하는 마지막 유언이 ⌜나는 독립을 못보고, 너희는 볼 것이니·····⌟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여기 南宮檍의 교육정신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미 말한 바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당시 기독교 교육의 공통된 理念이었으며 敎會學校는 그 위에 성경과 예배시간을 더했던 것이다. 南宮檍은 종교와 신앙교육은 자신이 직접 설립한 옆 敎會에서 추가 실천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基督敎 敎育의 한 實例로 南宮檍을 생각했다면 이러한 學校가 數百에 이르렀을 경우 그 정신적 영향이 얼마나 컸으리라는 것은 쉬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敎育의 理念的 差異는 자연히 그 결과의 차이도 가져오게 된다. 말하자면 졸업생들의 사회적 진출이나 역할에도 적지 않은 차이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가장 일찍 설립된 官立學校인 漢城學校(現 京畿)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세워진 畿湖學校(現 中央)와 약간 일찍 건설된 培材學校의 졸업생들의 分布에 따라 비교해 볼 수가 있을 것 같다. 學校가 설립된 이후부터 解放되는 해까지의 졸업생들이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살핀다면 설립정신이 다른 學校들의 敎育評價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는 官尊思想의 영향으로 세 學校를 지원한 학생들의 知的 水準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며 감리교에 속하는 培材보다는 長老敎 學校가 더 기독교적인 敎育에 熱誠的이었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셋을 비교함으로써 그 일반적인 추세를 보면 족할 것이다.

   기독교의 지도자인 牧師 및 神學者가 경기 1(0.15%), 중앙 3(0.5%), 배재 16(2%)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평양의 崇實學校는 長老敎 總會長만 11명이라는 숫자가 나오고 있다. 약 200명 정도의 목사와 전도사가 배출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관공리는 경기가 졸업생의 25%, 중앙이 11%, 배재가 7% 정도의 분포를 보인다. 교육자와 학자는 경기가 졸업생의 25%, 중앙이 24%, 배재가 30%로 배재가 약간 앞서고 있다. 의사와 약사는 경기가 20%, 중앙이 20%, 배재가 16%로 되어 있다. 별로 차이가 없는 숫자이다. 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경기 15%, 중앙 31%, 배재 31%로 되어 있다. 예술 및 언론인이 경기 1.1%, 중앙 2.5%, 배재 3%로 나타나 있다. 사회사업가는 경기는 나타난 바가 없고, 중앙 0.1%, 배재 1%로 되어 있다. 숭실학교는 6%는 확실히 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법조계는 경기 4%, 중앙 2%, 배재 3%로 되어 있다.

   이 통계를 미루어 본다면 公立學校는 역시 國家가 요망하는 人材를 많이 배출했고 基督敎 學校는 敎會와 社會가 필요로 하는 人物들을 더 많이 길러 냈다는 결론이 된다. 일반 私立學校가 그 중간을 택한 것 같다. 직업과 사회진출의 다양성을 보인 것은 公立學校보다 私立學校가 넓은 폭을 차지하고 있다. 이 숫자적 보고는 세 가지 교육이념에 따른 교육 결과가 그대로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5. 韓國의 近代化와 基督敎的 價値觀

   그러면 이러한 기독교 교육은 어떤 價値觀을 우리 社會에 주어 왔으며 그것은 韓國의 近代化와 어떤 關係를 맺고 있는가. 우리는 기독교적 價値觀을 취급함에 있어 그것이 學校 敎育에 국한되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모든 宗敎가 그러하듯이 基督敎도 敎會가 모체가 되고 교육이나 의료기관은 그 부수적 책임을 감당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學校 敎育을 포함한 基督敎 精神과 그 價値觀인 것이다. 그리고 그 價値觀이 우리의 近代化를 중심으로 취급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19世紀末까지 국민 대중을 좌우해온 유교적 價値觀과 本來부터의 기독교적 價値觀의 차이가 어디 있었으며, 진정한 近代化를 위해서는 어떤 價値觀이 요청되어야 하는가, 함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價値觀은 언제나 우리들의 意識構造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所望스러운 精神的 방향과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일 우리가 19世紀 末까지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해 온 정신적 유산과 기독교를 제외한 정신계에서 엿볼 수 있는 固有의 價値風土를 고찰한다면 어떤 것들이 있겠는가. 尹泰林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계층의식, 가족단위. 가학적 관원과 피학적 민중, 事理分析보다 人間關係 중시, 권위에의 굴종, 體面, 未來보다 過去를, 現世中心 等을 들고 있다. 그는 뚜렷하게 이들은 儒敎的 遺産이었다고 못 박고 있다. 高永復교수도 비슷한 見解를 밝힌 바 있다. 아마 대부분의 識者들이 共感하고 있는 常識일 것이다.

   그러나 筆者는 다음의 몇 가지를 기독교의 精神 및 價値觀과 대비시켜 보고자 한다.

   우리가 지녀 온 東洋精神의 전통은 漢文字 문화권에 속한다. 그 선조들은 自然에 순응하고 자연 질서를 받들며 살아왔다. 그런데 自然의 法則은 반복하는 법칙이며 반복은 必然性을 강요해 온다.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정신적 상황에 머물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運命論에 빠지기 쉽다. 幸運意識이 강해지며 ⌜한다.⌟는 개념보다는 ⌜된다.⌟는 생각을 깊이 지니게 된다. 따라서 人間이나 自然의 主體意識이 약화되며 歷史와 社會의 모든 것이 나의 선택, 결단, 노력에서 이루어진다는 意慾을 상실하기 쉽다.

   이에 비하여 基督敎는 無形의 절대적인 神을 상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인격적 의의를 강조해 왔다. 언제나 自然은 인간이 지배하며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낮은 차원의 것으로 가르쳐 왔다. 세계의 모든 信仰이 自然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으로 형성된 古代社會에 있어서도 셈 宗敎는 유일하게 그것들을 우상으로 배격하는 信仰을 강조해 왔다. 동양적인 전통에 대한 Humanism적 도전이 바로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儒敎的인 人間關係는 그 대부분이 上下의 종적관계를 유지 강조해 왔다. 어떤 때에는 統治者를 중심 삼는 倫理的 人間關係에 편중했다는 의혹을 받을 수도 있을 정도이다. 主權者의 선한 統治를 위한 社會倫理가 大部分이며 上下의 秩序가 권위의식을 굳혀준 결과가 되었다. 우리 社會가 유교적인 階級意識을 오래 탈피하지 못한 데도 같은 원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基督敎의 人間關係는 이에 비하면 깊은 橫的 關係를 강조함이 뚜렷하다. 한 하느님 밑에서 모든 人間이 동등하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生命은 天下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므로 비교적 빨리 平等意識이 움트게 되었고 民主的 成長을 재촉하는 추진력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기독교 정신의 바탕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비슷한 문제의 하나를 男尊女卑의 정신에서도 볼 수가 있다. 유교적 전통은 오랫동안 女性의 人權을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基督敎의 정신은 그것을 서서히 是正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家父長制度를 택해 왔다. 그러나 基督敎의 정신은 男女平等을 주장했으며 적어도 우리나라에 들어 올 때의 기독교는 그 人權的 平等을 강조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은 지나치게 家族中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립된 個體意識이 약했으며 넓은 意味의 社會意識을 갖추지 못했다. 지금도 우리는 子女들을 내 子息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所有인 듯이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독립된 人格體로서의 主權을 주지 못하고 있다. 또 지나치게 家族中心의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자연히 폭넓은 社會意識을 갖추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基督敎는 自我를 家族으로부터 독립시켜 神 앞에서 自覺케하며 다시 그 社會的責任을 묻는 종교로 성장했기 때문에 좀 더 풍부한 社會意識을 제시해 줄 수가 있었다. 기독교가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精神은 家族中心의 倫理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그 특색이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 社會의 近代化를 위한 Humanism 적 요소들이며 바로 그것들을 基督敎전통의 社會들이 앞당겨 성취시켰던 것이다.

   東洋社會는 풍부한 倫理意識은 갖고 있었으나 歷史意識과 科學精神은 뒤지고 있었다. 歷史意識의 빈곤은 발전의욕의 빈약과 더불어 未來指向的인 價値觀을 주기 어렵다. 世人들이 東洋社會를 가리켜 懷古的이며 過去中心의 사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전통을 존중히 여기며 保守的인 性向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비하면 基督敎는 처음부터 歷史的 宗敎이다. M. 엘리아드 같은 종교학자는 다른 宗敎들을 宗敎라고 부른다면 기독교는 그런 意味에서는 宗敎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宗敎는 自然秩序로부터 주어진 신앙이나 기독교는 歷史的 次元의 宗敎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철저하게 未來指向的 인 時間觀을 갖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옛날에 이런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만이 아니다. 바울의 정신이 그러했고 구약과 신약의 구조가 모두 未來指向性을 띄고 있다. 기독교가 우리 정신사회에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역사의식과 미래지향적 가치관이었던 것이다.

   물론 倫理, 과학, 歷史意識을 모두 갖출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倫理와 더불어 歷史性을 지니지 못한 社會는 그 社會를 動的인 입장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現實感覺이 부족해지며 그 倫理意識이 잘못되면 현실 도피적 경향에 빠지게 된다. 윤리성이 결여된 宗敎中心의 社會가 도피사회로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佛敎를 잘못 받아드린 社會가 이와 비슷한 社會氣風을 만들어 脫時間 및 脫歷史的인 과오를 범한 선례는 자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강렬한 歷史意識과 未來指向的인 價値觀을 호소하며 現實肯定에 따른 책임의식을 近代化의 精神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어느 정도 밝혀진 것으로 생각된다. 西歐人들이 經驗主義, 實證主義, 功利主義, 實用主義 등을 수세기에 걸쳐 강조해 온 것은 이러한 정신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動的으로 現實을 파악하며 實際와 實用性을 강조한다는 것은 近代社會 형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던 것이다.

   셋째로 크게 취급하고 싶은 문제는 合理와 科學精神이다. 이 科學精神이 메커니즘을 동반했기 때문에 그 近代的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 되었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의 信仰 그 자체가 合理나 科學을 강조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科學은 西歐社會의 업적이었고 그것이 基督敎 전통과 合流되어 왔다는 사실을 도외시 할 수는 없다. 우리 東洋人들은 自然에 순응해 왔고 西歐人들은 自然을 지배해 왔다는 예기를 했다. 그 自然에의 복종을 버리고 支配를 처음부터 가르친 것이 기독교 정신이었다. 또 다른 理由들이 첨가되었음은 사실이나 西歐人이 科學을 개발 발전시켜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 科學精神이란 어떤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科學의 바탕이 되는 것은 合理的思考라고 말한다. 그래서 서구사회를 合理的 傳統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合理精神이 구체화되면 몇 가지 뚜렷한 성격이 나타난다. 그 하나는 事實을 事實대로 봄으로써 眞實을 외면한 判斷은 어디서도 받아 들여 질 수가 없다.

科學은 언제나 理想이나 目的과 더불어 方法과 過程을 중요히 여긴다. ⌜무엇을?⌟하고 묻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러나 ⌜어떻게?⌟에 대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지식의 內容만으로는 學問이 되지 못한다. 方法에 따르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方法論이 빈곤하다는 것은 그 만큼 科學精神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方法은 반드시 過程을 필요로 하며 또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科學精神이 社會科學으로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모든 對人關係나 社會生活에 있어 客觀的 價値를 추구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客觀的 價値란 다른 것이 아니다. 全體를 지향하며 未來를 계획 추구하는 思考와 生活姿勢이다. 경험주의나 합리정신도 결국은 어떻게 生活에 있어 客觀的 價値를 추구하는가함에 대한 해답과 方法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社會科學은 그 기반 속에 일찍부터 이러한 客觀的 價値의 모색을 바탕삼고 있었다. 主義나 學問은 그 밑을 형성하고 있는 意識構造에서 피어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社會意識과 客觀的 價値의 추구가 없이 社會科學이 탄생된 일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近代文化의 創造를 논했다. 文化가 社會 모든 면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면 정신적 근대화는 불가능했으며 또 민족 특유의 文化 창조가 없이는 새 역사의 국면을 개척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기독교가 우리가 원하는 문화에 기여한 바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고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近代化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올바른 직업의식과 근로정신도 그 하나의 요소가 되며 形式이 허식으로 번지는 의식구조도 문제가 된다. 士 農 工 商의 직업적 계층의식과 일을 사랑하고 즐길 줄 모르는 폐습도 커다란 문제였으며 허례와 체면의식은 긴 역사에 걸쳐 우리의 內實性과 眞實性을 빼앗아 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世界史的인 近代化의 普遍性에 비추어 이미 제안했던 몇 가지 과제를 문제 삼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기독교 정신은 이미 말해 온 몇 가지 과제를 우리 社會의 近代化를 위해 해결 지을 수 있었는가 함이다. 옛날 불교는 당시의 社會的責任을 감안했고 뚜렷한 倫理性을 줄 수 있었을 때 新羅의 文化와 歷史를 창조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責任을 상실했을 때는 우리나라를 不幸으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사실은 朝鮮王朝의 儒敎精神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면 基督敎는 어떠하였는가. 지금 어떤 歷史的 方向과 과정을 택하고 있는가.

   우리는 基督敎가 19世紀 末부터 1910年의 韓日合邦까지는 순수하게 새로운 信仰精神의 씨를 뿌렸으며 開化와 國權確立에 이바지했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 당시에는 그 以上의 일을 기대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1910年부터 3 · 1운동을 거쳐 日帝時代에도 基督敎의 主流는 抗日運動과 더불어 그 社會的 意義를 굳게 지녀왔다. 3 ·1운동 당시의 基督敎는 새로운 힘과 希望의 象徵이기도 했다. 日帝末期의 일부 기독교들이 親日的인 경향에 동조한 바가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基督敎의 정신과 社會的 役割은 엄존해 있었다.

   그러나 解放과 더불어 大韓民國의 基督敎는 그 量的인 팽창에 치중한 나머지 基督敎 本來의 使命에서는 離脫된 感을 짙게 하고 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理由가 있었을 것이다. 敎會가 社會 속에 社會를 위해 存在한다는 意義를 망각하고 內向的이며 폐쇄적인 방향을 택했다는 사실, 그리스도가 준 삶의 眞理를 敎理 안에 가두어 두기 시작했다는 사실, 量的인 확장에 급급했던 나머지 思想과 學問的인 質的 成長에 차질을 초래했다는 사실, 基督敎 眞理에 確信이 적었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는 在來信仰으로 同化還元되어가기 시작했다는 事實 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많은 敎會의 지도자들은 敎會와 信徒의 量的 成長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敎會와 信者들이 우리 社會에 주고 있는 質的 變化는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우리는 큰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社會의 近代化的 成長은 겨자씨와 같은 責任이나, 얼마 안 되는 누룩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가능해 진다. 西歐의 敎會는 量的으로 대단히 貧弱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生活저류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여전히 기독교 정신이다. 이제 만일 누군가가 ⌜기독교에 모든 것을 맡겼을 때 그대들은 우리 社會를 어떤 精神的 方向으로 이끌어 가겠는가.⌟고 묻는다면 基督敎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近代的 휴머니즘에도 뒤지고 있으며 强忍한 歷史意識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科學精神은 外面하고 있는 실정이며 새로운 價値觀 設定과 文化創造에서도 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敎會가 基督敎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敎會가 그 母體이기 때문에 오늘의 敎會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때는 前近代的인 思考와 生活을 극복하지 못한 感이 있으며 基督敎 大學들도 知性社會를 이끌어가기에는 力不足인 批判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이러한 걱정스러운 結論은 韓完相교수의 論文과도 일치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에 그 세밀한 體系的 分析이나 處方을 논하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近代化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先輩들을 욕되게 해서도 안 되며 過去의 佛敎나 儒敎가 취했던 國家的 不幸을 되풀이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는 敎會의 껍질을 두터이 해가기 위해 그 알맹이를 썩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眞理로 돌아가 그 精神으로 病든 社會를 救出하는 基督敎 本來의 使命을 잊지 않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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